간절한 마음으로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마르 2,1-12)
|
박영대(우리신학연구소)
◆나는 기적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마 내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본 적도, 기적에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했던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에 내가 가장 절실하게 기도했던 건 큰딸 혜진이가 급성후두염에 걸렸을 때다. 그러나 그때도 기적에 기대야 할 만큼 위급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최근 기적을 바란다. 착하디착한 두 여자 때문이다. 한 명은 후배이고 또 한 명은 선배다. 둘 다 암에 걸렸다. 선배는 이민을 떠난 상태라 만날 수도 없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거짓말처럼 나아 오래오래 살면서 가끔은 내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내게 그 기적을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릴 것이다. ‘예, 그럼요. 간절하다마다요. 내 목숨을 바쳐도 좋아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서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 그만큼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간절함이 있다. 지붕이 아니라 하늘에라도 구멍을 내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건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그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 간절함은 사랑에서 비롯되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치유를 대가로 돈을 주고받는 일이 있다고 한다. 놀랍고 마음 아프다. 그 상혼이 질리게 무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