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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 27일 야곱의 우물-마태 4, 12-23 /렉시오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27 조회수432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마태 4,12-­23)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워낙 만나는 사람들의 폭이 제한되어서인지 아니면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인지, 사람들과 타협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 힘들 때가 더러 있습니다. 혼자서만 성실하고 의욕이 넘친다고 일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따금씩 별일도 아닌 미묘한 감정상의 일로 마음이 상하여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대인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평온한 일상이 여지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고요히 혼자 일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집니다. 잠시의 고달픔을 달래려는 막연한 도피 행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 때문에 살맛이 나다가 또 사람 때문에 좌절하기를 되풀이합니다.
 
알다가도 모를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예수님쯤 되면 혼자 힘으로도 거뜬히 본인의 소명을 완수하실 수 있으니 굳이 그 관계 속에 얽히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요.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우연찮게도 첫 과업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뜻을 같이할 일꾼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여러 조력자의 도움을 기꺼이 받으셨던 것이지요. 당신의 소명을 제자들과 공유하신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드디어 예수께서 요한에게 바통을 넘겨받으십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자신이 나설 때임을 아셨는지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하십니다(12절). 그분이 발길을 돌리신 첫 소임지는 변방 갈릴래아, 그중에서도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13절). 마태오는 굳이 이사야의 예언까지 길게 인용하며 이곳에 관해 상세히 토를 달고 있습니다(14-­16절). 요지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이민족들의 땅에 빛이 떠오를 것이라는 내용입니다(이사 8,23-­9,1).
 
북왕국이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한 뒤로 줄곧 이 땅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순수성을 잃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16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뜻밖에도 사연 많은 장소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 변두리 소외된 땅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곳이 이곳이었나 봅니다. 첫 출발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 요한에게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3,2). 예수님 역시 요한처럼 회개를 재촉하십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요한이 선포한 하늘나라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늘나라에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요한이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을 기대하는 것에 그쳤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가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선포는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향한 초대입니다. 요한은 아직 율법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예수님의 출현과 함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외침인 ‘회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초대장인 셈입니다.

 
대개는 스승이 제자들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제자들이 먼저 명망 있고 경건한 스승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은 좀 달랐습니다. 호숫가를 지나시던 예수님은 그물질하는 어부 네 사람을 눈여겨보십니다. 고기 잡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갈릴래아 사람들의 생계에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은 호수에 어망을 던지다가(18절), 아버지와 그물을 손질하다가(21절) 예수께 뜻밖의 초대를 받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20절),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22절)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의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즉각적입니다. ‘곧바로’,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지금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발견했기 때문이겠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과 가정을 위해 일을 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정을 내팽개친 것이 아니라 더 보편적인 가정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따르라’는 요구에 ‘버리고’ 따라나섰듯이, 부르심과 추종에는 신념에 찬 결단과 실천,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버림’을 실천한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예수님의 소명을 나눠 갖게 됩니다(19절).
 
첫 제자들과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예수님이 하신 일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일이었습니다(23절). 곧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치시는’ 일은 그분 전문이셨습니다(마르 1,`39; 3,`7­8.`10). 공생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그분의 소명이기도 하지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셨건만 그 소문은 시리아에까지 파다합니다(24절).

 
그분이 뽑은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응답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고르시는 법 또한 만만치 않으셨고요. 이제 예수님과 한 식구가 된 일꾼들은 자신들의 결단을 여러 차례 돌이켜 보았을 것이고, 일하다 말고 다 버리고 따라나섰던 오늘의 일을 자주 떠올려 보았을 겁니다. 아마도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치시는’ 일에 전념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며 자신들의 첫 응답이 헛되지 않았음을 가슴 깊이 느꼈겠지요. 무엇엔가 홀려 겁도 없이 선뜻 나선 무모한 용기까지도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새록새록 새기면서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16절)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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