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여행을 떠나요(느리게 가는 바다 열차 타보세요)
작성자최익곤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03 조회수474 추천수5 반대(0) 신고
 

어둑어둑한 새벽녘 서울을 떠났습니다. 히터를 켠 차 안에서 강릉역에 도착하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잤더랬습니다. 강릉에서 삼척까지 운행하는 ‘바다 열차’를 타기 위해 떠난 길이었어요. 체력을 비축해 놓겠다는 생각으로 잠을 자다가 멀리서 푸르스름한 빛을 보았죠. 바다였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바다만 보이면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잘 생긴 남자를 봐도 잠잠하던 가슴은 바다 앞에서는 속수무책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듭니다. 바다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아침 10시 30분, 비로소 진정한 여행 시작입니다. 강릉을 떠나 삼척을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실내는 기존의 기차와는 많이 달랐어요. 쿰쿰한 냄새가 났던 비둘기호의 촌스러움도, 초고속을 자랑하는 KTX의 날렵함도 없었어요. 좌석은 창문을 향해 있고, 창문은 또 얼마나 큰지요. 삼삼오오 짝을 지은 승객들은 앞으로 펼쳐질 광경들을 상상하며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한 걸음 뒤에서 그들의 표정을 읽다 보니 마음이 뜨뜻해지는 건 왜일까요. 웃음은 전염이 잘 된다 하죠? 어느새 저도 웃고 있었습니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몸짓, 손짓을 보며 즐겁구나, 행복하구나 알 수 있게 되더라고요. 기차 안은 여행자들의 들뜬 마음과 설렘으로 달아올랐습니다.
제각각 다른 곳에서 모인 그들이 한날 한시 같은 기차에 몸을 맡기고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었죠. 하는 일은 무엇일까, 저 사람들은 친구 사이일까,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왔을까….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조바심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정동진의 바다가 눈앞에 들어옵니다.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더군요. 날씨가 흐려서 안타깝게도 빛깔이 새파랗진 않았지만, 바다는 넘칠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신(神)을 믿지는 않지만, 만약 조물주가 있다면 바다를 만든 일만큼은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바다는 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짧은 생을 살아오면서 난 몇 가지 표정의 바다와 마주해 봤을까 궁금해지더군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평온하고 잔잔한 얼굴, 태풍이 와 펜션 코앞까지 들이닥친 거칠고 무서웠던 얼굴, 파도에 내 몸을 실어 주던 친근한 얼굴….
창밖으로 내내 바다가 보이는 건 아닙니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서린 산도 지나가고, 자주 터널 안을 지나갑니다. 간간히 이어지는 바다와의 조우는 승객들의 마음을 달래 줍니다. 마치 파도가 기차 안으로 들이칠 듯 바다와 가까워지는 구간이 있어요. 정동진과 안인, 옥계와 망상 사이가 그렇습니다. 모두들 얼굴을 창문에 닿을 듯 가까이 하고 아찔한 기분을 만끽하게 되지요.
누군가의 한마디가 들려왔습니다. ‘참 낭만적이다!’. 낭만이란 단어는 1970년대쯤 이미 없어진 줄만 알았습니다. 가수 최백호 씨였나요.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가 몇 년전 등장했었죠. 흔히 말하는 뽕짝 리듬에 맞춰 눈을 지긋하게 감고 다시 못 올 것에 대해 노래하던 가수의 비장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낭만을 모른다. 도대체 멋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하는 아버지의 얘기도 생각났습니다. 진정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잊고 살았을 뿐인가요.

하얀 연기가 길게 늘어지거나 기적 소리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두를 일 없이 느긋하게 달려가는 기차,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자연 풍경들은 화려하진 않지만 정겨웠습니다. 나도 모르게 편안해졌습니다. 낭만을 모르는 세대인 나는 어쩜 이게 낭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돌아오는 기차를 다시 타기 위해 종점인 삼척이 아닌 추암역에 내렸습니다. 플랫폼에 서서 잠시나마 동행이었던 승객들과 손인사를 나누었지요. 이제 삼십 분 정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오징어를 말리는 동네 주민들 사이를 지나 촛대 바위에 올랐습니다. TV 방송이 끝날 때 애국가 나오잖아요. 애국가 첫 소절에 나오는 일출 장면이 바로 촛대 바위라 하네요. 해가 바위 끝에 걸리면 영락없이 촛불이 된다는데, 갈매기 한 녀석이 도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여행객들 한 무리 덕분에 잠시나마 어촌 마을에 활기가 도는 듯했습니다. 이내 전처럼 조용한 분위기로 돌아갔지만요. 낯선 사람들이 왔다가 휑하니 돌아가고 나면 동네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행여 쓸쓸해지진 않을까 마음이 쓰였습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이미 익숙해졌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객량이 3개뿐인 귀여운 바다 열차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또 다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동해와 묵호, 망상, 정동진을 지나 다시 강릉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떠나왔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짧은 여행이었고, 싱거운 듯 끝나 버리는 바다 구경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떠나오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습니다. 바다처럼 마음의 폭도 넓어져 있을 테고, 느릿느릿 걸어갈 줄 아는 여유도 갖게 되었을 거예요. 난 어쩌면 한 뼘쯤 더 행복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느리게 가는 ‘바다 열차’ 여행

동행이 없어도 좋다 싶습니다.
끝 모르게 펼쳐진 바다는 내 허물을 덮는 속 넓은 친구이고,
제 갈길을 지켜 나아가는 기차는 속내를 잘 들어 주는 반듯한 친구입니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까다롭게 추려내어도 해마다 늘어만 가는 내 소망들을요.
모두 이뤄 달라고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기차는 창밖으로 바다를 담고 묵묵히 달려만 갑니다.
험한 길에서는 속도를 늦추고,
간이역이 나오면 잠시 쉬어 갑니다.

아, 이제 깨달았습니다. 산다는 건 이런거군요.
때로는 숨을 골라야 한다는 걸,
때로는 멈추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무의미한 욕심은 버리고 소중한 희망만을 가져야 한다는 걸.
새털처럼 가볍게 살아가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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