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 수녀(천주섭리회)
◆어느 날 선배 수녀님이 소임과 관련된 일로 내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수녀님이 모르는 것만 알려드릴게요. 저보고 다 해 달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볼멘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스스로도 의아스러웠다. 그 수녀님의 단순한 부탁에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모습이 다시 떠오르면서 ‘화’의 바탕을 볼 수 있었다. ‘왜 나만 일해야 되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는데? 왜 너는 하면 안 되는데…?’ 예전에 바로 아래 여동생과 비교하면서 씩씩거리던 기억이 줄줄이 사탕으로 올라왔다. 내 생각에 여동생은 여러 가지로 나보다 월등하게 잘나 보였다. 외모며 재능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발휘되는 유머 등. 나는 동생을 보면서 언제나 위축되었다. 어머니나 오빠가 나한테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면 ‘왜 나만 해야 되는데? 왜 동생은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화를 냈던 일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그때의 불만스런 감정은 내 안에 있는 재능을 인정하거나 누군가가 부탁할 정도로 나에게 힘이 있다는 자긍심을 일깨우기보다, 어머니나 오빠는 동생을 시켜도 되는데 하찮은 일은 내가 하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에 나를 시킨다는 열등의식을 키워갔다. 감정을 불러일으킨 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의 내면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보다는 어머니나 오빠가 어떻게 나를 대하고 있는가 하는, 내 밖의 움직임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 정리되지 않았던 감정더미가 그날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묻혀 있었던 나의 면모가 고개를 들추고 일어난다. ‘그것은 화낼 일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하면서 어머니·오빠·선배 수녀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 마음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 만물의 근원이신 말씀이 나의 근원을 움직여 감사드리게 하고, 그것은 이웃에게 빛과 향기로 피어난다.
누구보다 주님은 우리 사랑하셨네
누구보다 주님은 우리 사랑하셨네
밤의 별같이 우리를 이끄시네
빵을 같이 나눌때 주님 사랑주시네
우정의 성사 하느님의 빵
내 성체를 받아먹어라
내 성혈을 받아마셔라
나는 생명이요 사랑이니라
우리 너의 사랑에 이끄소서.
누구보다 주님은 우리 사랑하셨네
그의 큰 사랑 십자가 죽기까지
그의 강한 사랑은 죽음 쳐이기셨네
개선한 주는 영영 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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