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 수녀(천주섭리회)
◆예수께서 세관으로 가서 레위라는 사람을 만나신다. 그는 통치하는 이들을 위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하급 관리인이고, 식민지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서민이며, 나라를 등지고 사는 ‘매국노’라는 딱지에 마음이 갈래갈래 찢긴 불쌍한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레위는 자기를 바라보는 예수님한테서 따뜻한 마음과 시선을 느꼈다. 자기 앞에 ‘계심’ 자체로 전후의 모든 것을 잊게 하시고, 바로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있음’을 깨닫게 하는 분 앞에서 따뜻해지는 마음을 느끼면서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그리고 자기 집에 동료들을 불러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잔치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있음을 느끼게 하는 분으로 바뀌었다. 그곳에 참석한 이들에게 ‘세리’라는 직업은 파티에 참석한 귀부인들의 귀걸이 정도로 느껴졌고, ‘매국노’라는 따가운 시선은 손목에 걸친 팔찌 정도로 느껴졌다.
어느새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눈에는 어쩔 수 없는 ‘고집스러움’이라는 안경을 끼고, 손가락에는 한 글자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쌓아온 알량한 지식이라는 가락지를 끼고, 몸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차단하는 방한복을 걸치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흐르는 생명의 숨결에 묻혀 ‘있음’의 축제에서 마음의 의식은 가볍게 가볍게 자유의 춤을 추고 있었다. 저절로 흥겨움의 몸짓이 되었고, 어제와 내일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묻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있음’의 잔치가 무르익어 갈 때, 예수님에 대해 호기심 많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잔치자리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내건 사람들이었기에 불평불만 외에는 어떻게 함께 ‘있음’을 즐겨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고는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들을 쏟아놓는 것으로 함께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음에 목숨을 건 그들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긴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바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있음’ 자체이신 하느님을 생명으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이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다.
축복해요(축복송)
축복해요 당신의 삶이 넘치길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길
사랑해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의 사랑 가득 하기를 원해요
당신의 삶속에서
주님의 향기 풍겨 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충만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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