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산상설교는 실천 가능성 있는 말씀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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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8-02-15 | 조회수529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산상설교는 구체적 실천 가능성이 있는 말씀인가?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도대체 나약한 인간이 그대로 실천하기엔 너무 높은 이상인 것 같다. 실제로 아주 옛날,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성경을 집어던진 적도 있었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으로 사람을 옭죄고 죄의식에 빠지게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에 대해 과거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그 말은 그만큼 실천하기 힘든 과제라는 말이 아닌가. 당연한 일이지만 이 말씀 때문에 고민한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내로라하는 학자들조차도. 그러니 어찌 반갑고 고맙지 않겠는가.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해봤던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그 논란들을 요약소개해보고자 한다. 다만 일일이 책을 찾아보지 못하고 강의로 들은 말씀이라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을 미리 알려둔다. => 표시는 각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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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H. Windisch의 견해: 완벽주의적 해석.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계명을 주면서 완벽한 준수를 기대했다는 주장이다.
=> 그러나 이 견해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산상설교를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 보는 견해라 하겠다. 또한 Wellhausen은 산상설교를 Talmud와 결부시키기도 하는데, 우리는 복음이 유대교의 범주를 훨씬 능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② 정통 루터교의 견해: 이행불능의 이론이라는 해석.
인간적 조건으로 볼 때 산상설교는 인간이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 산상설교의 요구는 인간의 무능과 한계, 죄책감을 깨닫고 은총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로마 7장; 율법의 무능을 거론하는 장 참조.)
=> 그러나 산상설교는 인간의 무능을 논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선행 의지의 이행을 예수께서는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 7,13-27의 “제자의 길은 좁은 문, 비좁은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는 맥락에서).
즉 참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계명과 지시를 따라야 할 것이다. 마태오는 ‘주님 주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며 실천이 따르지 않는 신앙에 경종을 울렸다. 마태오 25장도 신앙의 실천에 비중을 둔다.
③ J. Weiss 와 E. Schweizer 의 견해: 잠정 윤리적 해석
산상설교는 종말의 전면적 파국에 직면하여 최대 최선의 노력, 세말 직전의 회개를 위한 마지막 설교요, 호소라고 보는 것이다.
즉 긴박한 최후 시각(종말이란 예외적 상황)을 당하여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라 하겠다. 이 견해는 복음을 쓰던 시대는 종말이 목전에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오늘은 오늘의 시대에 맞는 윤리적 요구를 이행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알버트 슈바이처는 이 주장을 한 사람으로서, 자기 시대에 요구하는 바는 '생명의 외경'이라해서 의학공부를 하고 아프리카 오지로 떠났다. (그는 원래 신학 대사전을 8권이나 편찬한 성서 신학자다.)
=> 그러나 산상설교의 가장 큰 역점은 인간의 노력에 전적인 신뢰를 둔다기보다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데에 강조점이 있다. 또한 그분의 말씀은 당시나 현대, 세말 직전뿐만 아니라 세말 이후에도 해당한다.
④ Gerd Theiben의 說:
카리스마적인 유랑 설교가들에게는 실천 가능하다고 본다. 예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들 수 있다.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간간이 있어 왔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실행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론을 정리하면, 산상설교는 계율이 아니라 ‘초대’이다. 법이 아니라 福音이다.
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여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이라고 요구하는데 반해, 복음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새 삶의 토대로 삼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멍에로써 씌어준 게 아니라 반대로 생활화시킨 신앙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를 조건 없는 은총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를 새롭게 살도록 초대하신다. 즉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지금 그 보답으로 하나의 새 삶이 자라나기 시작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의 초대를 은총으로 소중히 받아들이되 내가 실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 전 생애를 통해 풀어나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상은 백운철 스테파노 서울가톨릭 신학대학 성서신학 교수신부님께 들은 강의 내용.) ...........................
여기에 덧붙여, 산상설교에 이어지는 8-9장의 치유모음집이나 그 이후의 복음서 전반을 보면,
결국 산상설교의 이상은 우리 혼자 풀어나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다. 그분이 우리의 ‘병고와 허약’을 치유시켜주시며 ‘함께 하시는’ 가운데 그 완덕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시고 모범을 보여주신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는(마태오의 끝 구절) 주님의 약속을 믿고 부족한 나 자신을 완성해주시도록 믿고 맡겨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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