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강론 . . . 류해욱 신부님
작성자박계용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28 조회수732 추천수13 반대(0) 신고
 

 
 
 
          2월 17일, 바이칼 호수를 떠나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목사님이 한 분 동행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과 함께 의논하여 신구교가 합동으로 예배와 미사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개신교 측에서는 주로 ‘말씀의 전례’ 부분을 맡아 장로님의 축도와 대표 신자의 기도, 목사님의 설교를 하고  제가 ‘성찬의 전례' 부분을 하기로 했는데, 신부의 강론을 듣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저도 강론을 하였지요.

     제 강론이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고, 감동적인 내용도 아니었지만 설원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달리면서 드리는  미사라는 분위기 탓이었는지 많은 분들이 제 강론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고도원님은 강론 내내 진주를 뿌리셨고 미사 후에 아주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지요.

     시간 때문에 쫓기며 드린 성찬의 전례도 마치 마상에서 온 신경을 모아서 드리는 예배처럼 느끼져서 은혜가 컸다고 했지요.

 

     저에게 무엇보다 기쁜 것은 가톨릭 신자가 7 분이 계셨고 그 중 4 분이 냉담 중이었는데 4 분이 모두 다시 열심히 신자 생활하겠다고 제게 약속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롭지요.

     여러분들은 이미 들은 내용도 있지만 제가 시베리아 열차에서 했던 강론 나눕니다.


     <  절대 고독,  그리고 영혼의 우물  -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강론 >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설원을 지나면서 신구교가 함께 모여 예배와 미사를 드릴 수 있어 기쁘고

     하느님과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고도원님이 우리에게 오늘의 수칙 등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던 여러 화두 중에서 두 가지,

     하나는 ‘절대 고독’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우물을 깊이 파라’  이라는 화두가

     제게 깊은 울림으로 왔기 때문에  두 가지를 중심으로 평소 생각했던 묵상거리 몇 말씀 드리고 싶습니  다.

 

     * 첫째, 절대 고독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눕니다.*

 

     개신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마는

     가톨릭에서는 사순 시기를 맞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낸 40일을 상기시키며

     세례 받으신 이후에 광야에 가서 기도하시고 유혹을 받으신 복음대목을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복음에서 보면 세례를 통해 축복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 축복의 의미를 새기시려고 택하신 장소가 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광야를 선택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선 광야는 외로운 곳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철저히 혼자이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로지 홀로 서시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신 것입니다. 바로 절대 고독을 찾아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절대 고독 안에서는 누구나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하느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절대 고독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광야에 가신 것입니다.

     거기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면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만난 후 찾아온 자가 있었으니 그는 유혹하는 자, 악마였습니다.

  

     우리도 때로 온전히 혼자 있는 절대 고독의 시간, 광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광야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하느님하고만 지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아무의 도움도 소용이 없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단식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광야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한 얼음 위의 명상도 어쩌면 광야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도움은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닉하게도 그것을 깨달으며 안도의 쉼을 쉬려 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유혹하는 자입니다.

     바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셨고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옴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명을 받으신 위대한 체험의 순간이며 축복의 시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런 축복의 시기, 은총의 시간, 위대한 순간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은총의 순간 이후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것이 바로 시험의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놀라운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바이칼 얼음 위에서 명상을 하면서 영혼의 두레박에 맑은 물을 마셨다면,

     그리고 이제 보다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며 바이칼 명상여행을 새로운 삶의 출발로 삼았다면,

     은총이고 축복이며 위대한 순간이지요.

     그런데 이때야말로 조심해야 하는 때입니다.

     질투가 많은 악마가 견디지 못하고 안달을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마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분께 의탁할 때, 그분이 도와주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의 체험이 다만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잘못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께서 내면적으로 겪으신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마음과 정신, 영혼이 겪는 갈등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실상 유혹하는 자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생각과 바람을 통해서이지요.

     악마가 우리를 공격하는 부분은 언제나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생각이지요.

     가장 그럴듯한 생각을 불어넣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우리를 시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부하심으로서 악마를 패배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물러갔지요.

     그런데 영원히 간 것입니까? 루가 복음 사가는 분명하게 말하지요. 그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물러갔다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안 된다고 할 때

     다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지요.

     보십시오. 그 순간도 바로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위대한 순간이었지요.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다. 바로 네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위대한 은총의 시간이고 축복의 순간이었습니  다.

     그 때 사탄이 베드로에게 와서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습니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늘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분께 매달릴 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외쳐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외쳐 주셨던 것처럼. '사탄아, 물러가라.' 어느 누구도 유혹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유혹에서 제외된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약한 우리 인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늘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시험을 이기고 더 정진 할 수 있도록 . . .

 

                                      

 

              *두번째 이야기...영혼의 우물은...2월 24일 ...34008번 글에 올려 있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