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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작성자최익곤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05 조회수585 추천수2 반대(0) 신고
 
 

 

    ‘엿장수 딸에서 하버드대 박사까지’ 희망전도사 서진규



    2008년 2월 18일 (월)서울신문

    
    [서울신문]“아줌마 희망 한단에 얼마래요?”
    “희망유? 몰라유, 채소나 한단 사가슈∼선생님?” 
    
    장사익씨가 부른 소리판 ‘희망 한단’에 나오는 대목이다.
    
    8년 전 어느날 미국에서 살던 한 아줌마가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화두를 던지며 고국땅을 밟았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조용했지만 입소문을 통해 삽시간에 퍼지면서 
    점차 요란해졌다. 그가 펴낸 책은 한동안 각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방송국의 특별 프로그램 등에 초청됐고 언론지면을 
    통해 그의 삶이 종종 전해졌다.
    
    까닭이 있었다. 잡초처럼, 지독하리만큼 억척스럽게 살아온 한많은 
    여인네의 삶 그 자체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절망으로 쓰러질 때마다 
    희망의 지팡이에 의지해 오뚝이처럼 일어선 생생한 경험담이 많은 
    감동을 선사했던 것. 그 어떤 영화 속의 주인공보다 더 찐한, 말 
    그대로 신선한 ‘희망의 메신저’나 다름 없었다.
    
    파란만장한 인간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1948년 경상남도 
    월내라는 어촌마을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남동생 중 한 명은 
    미군 복무 중 사고로 요절했으며, 한 사람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시골에서 세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
    로 올라와 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면서 풍문여고를 다녔다.
    
    잡지판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다. 얼마 후에는 
    관악컨트리클럽 캐디로도 근무했다. 그러던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삯 100달러만 달랑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식모일도 하고 한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틈틈이 영어공부를 
    했다.
    
    1975년에는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
    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이를 피하려고 미 육군 사병으로 입대했다. 
    일등병일 때 용산의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고 상등병 
    시절에는 고된 훈련을 무사히 거쳐 장교로 임관하는 끈기를 보여줬다.
    
    이후 독일과 일본 등 주로 해외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대학을 전전한 
    끝에 1987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마흔두살 때
    인 1990년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했고,2년 뒤에는 하버드대 국제
    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대위 때 하와이에서 
    패트리엇 미사일 장교로 근무하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한 그는 2006년 당당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딸도 어머니와 함께 하버드대학을 다녀 
    ‘하버드 최초의 모녀 재학생’으로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딸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하버드대 졸업 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 중이다.
    
    최근 그는 ‘서진규의 희망’이라는 3번째 책을 펴내 ‘희망전도사’로 전국 
    곳곳에 강연을 다니느라 분주하다. 또 한달에 한번꼴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판 책자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적인 성공전략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잭 캔필드가 주도하
    고 있다. 잭 캔필드는 “미군과 하버드에서 살아남은 이 여성의 드라마틱
    한 인생 이야기는 우리들의 삶에 무한한 영감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동기
    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며 영어판 발간은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얼마든
    지 통할 만한 소재로 여긴다는 것.
    
    이래저래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서 박사를 만났다. 명함을 받았더니 
    이름 밑에 ‘희망연구소 소장’‘박사’‘예비역 소령’이라는 직함이 보였다. 
    얼굴에는 나이답지 않게 가냘픈 소녀와 같은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저런 
    연약한 모습에서 어떻게 불굴의 정신이 나왔을까. 
    
    손에는 자신이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3권을 들고 있었다.‘나는 희망의 증
    거가 되고 싶다’는 35만부,‘서진규의 희망’은 15만부 등 모두 50만부가 넘
    게 나갔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딸 얘기가 나왔다.
    
    “딸은 구두닦이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녔어요.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서 한 켤레에 2달러를 받고 구두를 닦았지요. 나중에는 특히 군화를 잘 닦
    는다는 입소문이 퍼져 동네에 사는 군인들이 우리집에까지 군화를 들고 
    왔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 딸의 아르바이트를 도와주느라 장교인 제가 
    퇴근 후 계급상 하급자들의 군화도 닦아주는 일이 많았습니다.(웃음)”
    
    딸은 지금도 어머니에게 매달 100만원씩을 꼬박꼬박 보내 줄 정도로 효성
    이 지극하다.ROTC로 임관할 때는 어머니한테 거수경례로 선서를 해 참석
    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당시 하버드대측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서 박사는 이같은 사연과 함께 딸을 키운 이야기를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제목으로 2000년 책으로 펴냈으며 지금
    까지 17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또한 올해 안에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현지 출판사측에서는 
    “딸을 어떻게 키우면 딸이 부모에게 돈을 보내게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정하면 어떠냐.”는 농담 섞인 제안을 하고 있단다. 
    한국의 풍습과는 달리 미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출판일 때문에 매달 미국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서 박사의 인생에는 영화가 몇 편 들어 있다. 미국사회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해요.”
    
    국내에 있을 때는 주한 미군병원에서 C형간염을 치료하면서 각종 단체와 
    지방 등지에서 ‘희망강연’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한다. 지난 설 직전에는 
    국군방송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한번 주어지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좌우된다.”면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줄 
    때 분명 꿈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처음 군입대했을 때 윗몸일으키기 
    한번 제대로 못해 겨날 뻔했으나 오직 ‘나 자신만’을 믿으며 이겨낸 일화도 
    소개했다.
    
    오늘날의 서 박사를 있게 한 것은 척박한 그의 집안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엿장수, 어머니는 술 장사를 했다. 이런 여건탓에 주위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반발심으로 ‘공부를 잘해야겠다’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히려 척박한 여건이 우물 안 개구리를 탈피할 수 있도록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었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했지만 오빠에게 밀려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아메리칸드림’을 꾸었다. 미국에 가면 창녀가 된다는 주위 비아냥에 
    “내가 창녀가 되면 반드시 장을 지진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정도였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보다 멀리,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정해 도전을 거듭하며 소중한 결실을 맺게 됐다.
    
    그는 요즘 틈틈이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왜냐고 했더니 
    “세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면 내 마음의 꿈이 커야 하지 않겠느냐.”
    고 반문한다.
    
    이어 “미 대통령은 내각에 영웅을 필요로 한다.”면서 “책 잘 팔리고, 
    영화화되고, 미국에서 강연도 휩쓸고, 하버드에서 국제사를 전공했으니 
    외교역량도 있고, 장차 미 국무장관감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며 웃는다. 
    
    그런 다음 여세를 몰아 노벨평화상과 맞먹는 ‘세계평등상’을 제정, 전 세계
    인에게 꿈과 희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고 했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기에 10년 내에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이민자 출신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들이 해냈듯이 
    말입니다.”
    
    인물 전문기자 
    사진 김명국기자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경남 기장 출생
    ▲67년 풍문여고 졸업. 가발공장, 골프장 캐디 등 근무
    ▲71년 도미
    ▲75년 미 육군 입대
    ▲87년 미 메릴랜드대 경영학과 졸업
    ▲92년 미 하버드대 석사
    ▲96년 미 육군 소령 예편
    ▲2006년 하버드대 국제외교사·동아시아언어학 박사
    
    ■ 주요 저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1999), 
    희망은 또다른 희망을 낳는다(2000), 
    서진규의 희망(2007)
    
    
캐논_J.Pachelbel 파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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