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장익 주교님께서 과거에 사목연구소를 시작하셨을 때,
하루는 편지 한 통을 받으셨단다.
내용인즉,
“천주교에서 이번에 사목연구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연락을 드립니다.
저는 경상도의 시골 산속에서 뱀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제 연구에 관심을 주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던 차에
천주교 같은 큰 종교 단체에서 뱀 연구를 시작하셨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합니다.
이에 귀 연구소와의 교류와 합동 연구를 희망합니다.
특히 천주교가 더욱 전문적인 영역인 뱀눈을 연구한다고 하니
기대되는 바가 큽니다.”
사목(司牧)이 누군가에게는 사목(蛇目)으로 이해되고,
천주교는 졸지(?)에 전문적으로 뱀눈을 연구하고 있었다.
신학생 시절,
그 당시의 우리들은 방학을 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공소에 파견되어 생활했다.
장차 사목자로 살아갈 사람들이기에
학생 시절에 미리 사목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동시에 신부님들을 돕고자 하는 취지였다.
2학년 여름방학에 처음으로 공소에 파견을 나갔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에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
우선 아이들을 모아 첫 영성체 교리를 겸해서 여름신앙학교를 열었다.
소창 율동에 교리를 가르치고,
가끔은 개울에 멱 감으러 가고,
부모님들이 챙겨주시는 옥수수, 감자 등 간식을 먹곤 했다.
아이들은 그저 누군가가 자신들과 놀아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저녁이 되면 들일을 마친 어른들을 공소 강당에 모아
재교육 교리강좌를 했다.
고된 노동에 지친 신자들은 피곤에 겨워 눈을 껌벅거리면서도
내 교리를 주의 깊게 들어 주었다.
주일이 되면 공소 예절 중에 강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신학교 2학년생이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하여 웃을 일이지만,
그 당시 나는 그들에게 교리교사였고,
신앙의 조언자였으며, 나아가 인생의 상담자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민과 가정 문제, 삶의 어려움을 토로했고,
사실 나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나름대로의 조언을 해야 했다.
그래도 신자들은 부족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나를 미숙한 청년이 아니라 사제가 될 사람,
아니 사제의 대리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공소 마당에 혼자 앉아 부서져 내리는 별빛에 젖곤 했다.
‘장차 내가 만날 별처럼 많은 신자들에게
나는 어떤 사제, 어떤 사목자가 될까...’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바람에 합치하는 그런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고백소에서 가끔 듣는 표현이
‘전능하신(?) 신부님’이다.
교우들의 작은 실수가 불경스럽게도
신부를 ‘전능하신 하느님’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신부는 전능하지 않다.
매우 나약하고, 결점이 많으며, 모르는 것도 많고,
때로는...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오늘을 살며
사목자로 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젊은 시절의 순수한 열정과
치열한 자기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쯤 밤을 새워 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은 사제는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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