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그를 심판 하지 않는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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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08-04-16 | 조회수673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 44-50)
-유광수 신부 -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하러 이 세상에 왔는가?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왜 왔는지 그 목적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런 것들은 나의 힘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리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에 깊이 감사드린다. 만일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단죄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면 나 자신부터 살아 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까지 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은총이 나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오직 벌을 받을 뿐이다. 단죄는 당신은 죄인이다 라고 공포하는 것이다. 일단 죄인이라고 공표되면 다른 방도가 없다. 즉 단죄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요, 절망에 빠지게 하는 일이요, 마침내 죽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구원은 살리는 일이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요,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 내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가? 단죄인가 구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는 단죄하는 일을 행하는가?
정치하는 사람들도 나라를 구원하겠다는 말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비방 폭로 등 단죄하는 말들만 한다. 이 세상에는 온통 단죄하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아주 오랜 일들까지 들추어 내면서 단죄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그런 것이 잘하는 것 인양 되어버렸다.
성직자 수도자의 입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말보다는 단죄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온다. 하지 마라. 그것은 안돼. 저 사람은 안돼.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저 사람은 가능성이 없어. 너는 성격이 나뻐, 네가 하는 일은 늘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나 등 구원의 말보다는 단죄의 말들이 너무나 성행하고 있다. 단죄하는 언어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말이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구원의 일을 해야할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입에서조차 너무 쉽게 나오는 단죄하는 식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말로 바뀌어져야 한다.
구원의 언어란 사람을 용서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다.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말이다.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말이다. 응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내가 했으면 더 못 할 뻔 했는데 이 정도면 너 참 잘 했다. 야 그것 참 예쁜데, 아이구 참 멋있어요, 다시 해봐 너는 잘할 수 있을 꺼야 등 상대방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들이 구원하는 일이요, 언어들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단죄의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살리는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단죄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구원하는 행위를 할 것인가? 단죄가 성행하고 있는 사회에서 구원의 언어를 구사할 때 구원의 행위를 행할 때 바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는 오늘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단죄하던 사람이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서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죄하는 사람에게서 구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단죄하는 인생에서 구원하는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상처 주고 못된 일만 하던 삶에서 좀 더 보람있고 가치있고 남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왜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가?라고 질문하고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늘 사람을 살리려고 하신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는 분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악인을 단죄하지 않으시는 것은 끝까지 악인이라도 살리시고자 하시는 것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주일씨가 담배는 독입니다라고 금연 광고에 나와서 아무리 이야기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담배를 끊지 못한다. 담배를 피우지 마라 마라 고 한 그 말을 듣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려 죽는 것이다. 결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 고했던 그 말이 그 사람을 단죄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을 듣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은 암이라는 병으로 단죄 받지 않았을 터인데 결국 듣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죄 받은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단죄가 아니라 구원의 말씀이 되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수님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신 대로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우리말대로 하지 말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말씀하신 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결국 우리는 단죄 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끝 날에 단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살리기 위해 말씀해주신 대로 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즉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나를 단죄하신 것이 아니다. 오늘도 내가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은 나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나를 살리시기 위해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다만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말을 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나 스스로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 스스로 단죄 받게 될 것이다.
하루 이틀 사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단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결국 나를 어둠 속으로 몰아갈 것이며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이 구원하기 위해 하신 그 말씀이 나를 단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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