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금 있으면'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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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08-05-01 | 조회수555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조금 있으면> (요한 16, 16-20)
-유광수 신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 이전의 예수님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예수님이시다.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어제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주 오래 전에 우리 수도회에서 지원자로 생활했었던 어떤 형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형제가 전화로 "신부님,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신부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신부님은 나의 어버지이시잖아요. 내 인생에 신부님을 만나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수도생활을 끝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신부님을 통해서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올바로 갖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신부님 생각이 많이 나고 신부님을 생각하면 마음의 고향같은 생각이 듭니다. 신부님 건강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작은 선물을 부쳤는데 내일 받아 보실꺼예요. 작은 것이지만 신부님 건강에 좋은 것이니까 냉장고에 넣었다고 조금씩 드세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형제와 통화를 하면서 "내가 너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해 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래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잘 읽어보아라. 그러면 많은 은혜 받을 것이다."라고 통화를 마쳤다.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어서 책을 내었는데 "하늘 나라 우체국"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 이런 글이 있다. "이젠 목메도록 그립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죽을 정도로 후회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가슴속에 사무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사랑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우리가 부모를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 또는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을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서야 고백할 수 있는 참회록과도 같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조금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아니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나 보다. 반드시 제자들이 지금은 당신의 죽음으로 슬퍼하겠지만 당신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받아야할 은혜가 있다면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면서 받는 은혜가 있다면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된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복음 묵상의 의미가 없다. 아니 복음을 묵상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죽음을 승리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즉 복음 묵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부활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부활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지 못하고 죽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기쁠 수가 없다. 모든 일이 근심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죽음을 물리치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질 것이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기적이다. 은혜이다.
근심이란 무엇인가? 괴롭게 애를 쓰는 마음이다. 심리적으로 어떤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언제 우리는 근심하게 되는가? 근심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보통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아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 기쁨으로 바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심하는 많은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넓고 깊은 세계 즉 부활이라는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무엇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지금 갖지 못한다고 해서 근심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에 있어서 초연해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 많은 경우 내가 근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보면 근심거리라고 하는 모든 것들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당신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알려 주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더 묵상해보면 이 말씀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부활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부활하면 새롭게 보이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이 영적으로 눈이 뜨이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그 단계에로 넘어가기까지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씩 볼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30년의 신앙 생활을 했으면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아니 영적으로 눈이 뜨지 못한 생활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되는 영성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부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부활하지 못했을 때에는 근심이었던 생활이 이제는 모두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볼 수 있게 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그 "조금 있으면"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는 각자의 영성 생활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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