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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 류해욱 신부님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27 조회수606 추천수7 반대(0) 신고
 
 
 

 

삶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 류해욱 신부님

 

  이 현주라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한번은 어떤 처녀가 전화를 걸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대요. 그 처녀의 사연인즉, 자기는 재수생으로 학원에 다니고 있고 학원에서 반장을 하는데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못했다고 담임한테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격을 모독하는 언사를 듣고 밤에 잠을 자지 못했고 지금 미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생 보기 싫어서 학원에도 못 가겠고, 그렇다고 아주 그만둘 수도 없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엄벙덤벙 이런 말이 오고 갔답니다.

  “자네가 선생이라면 그럴 경우 어떻게 했겠는가?”

  “제가 선생이라면 반장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인격을 모독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감이다. 그렇다면 그날 자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선생이 잘못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도 선생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이다. 자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선생이 잘못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답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선생이 잘못했는데 왜 자네가 괴로워하느냐는 점이다. 자네가 자네 잘못 때문에 잠을 못 자며 괴로워한다면 이해가 되겠는데, 왜 남의 잘못 때문에 자네가 괴로워하는가?”

  시간이 없어 전화를 끊고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실 처녀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을 말을 던진 셈이지만 그 처녀가 그 말을 무슨 화두처럼 붙들고 씨름한다면 뜻밖에 괜찮은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생이 잘못을 했는데 왜 내가 괴로운가?’ 내가 바로 그 당사자이기 때문이지요. 그가 나에게 잘못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가 자존심이 상했고 그것이 괴롭습니다. 이 현주 목사님이 여기서 더 나아가서 지적하는 것이 “그 선생의 비난의 말을 받아들일 ‘나’가 없다면 그래도 괴롭겠는가?”

  내가 왜 없는가? 그래도 만일에 없다면? 없는 내가 무엇을 괴로워하겠습니까? 제가 지난 성금요일에 했던 강론,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면, 화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의 말씀, 자기를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 그 길을 가고 있지 않은 것이지요.

  시인 류 시화가 자기의 체험을 나눕니다. 인도 여행 중에 쑤닐이라는 음악을 하는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그날 저녁에 라비 상카의 시타르 연주회가 있으니 들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너무 흥분하여 물 컵을 쏟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흠모해마지 않는 대가의 음악을 듣게 되는 행운을 기뻐하면서 저녁 여덟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일곱 시 반부터 가서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홉 시가 되어도 오지 않고 드디어 아홉 시 반이 되어서는 쑤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릭샤를 잡고 수소문을 하여 연주회장에 도착하였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쑤닐은 연주회장 맨 앞줄에 폼을 잡고 앉아 있었답니다. 자기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고서 저 혼자 먼저 와서 좋은 자릴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것이었지요.

  여러분들, 화가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도를 닦는 류 시화도 화가 치밀어 올랐답니다. 나를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는 자기는 태연하게 앞자리에 앉아있다니! 화가 나서 걸어가서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겼답니다. 돌아보는 그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물었답니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아, 그래요.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아아,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지요. 라니…….그런데, 그가 화난 얼굴로 노려보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쑤닐이 말했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내 잘못을 갖고 자신까지도 잘못된 감정에 휘말리는군요. 그건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요?”

  그 지적에 놀라서 쑤닐을 돌아보는 순간 띠융띠융 하며 라비 샹카의 시타르 음들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답니다. 쑤닐이 또 말했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이 두 이야기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선생이 잘못했는데 왜 내가 괴로운가?”

  “당신은 내 잘못을 갖고 자신까지도 잘못된 감정에 휘말리는군요. 그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우리의 삶이 기쁘지 못하고 괴롭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 나를 화나게 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옵니까? ‘나’이지요. 내가 무시당했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맞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설령 남이 나를 좀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내가 정말 낮아졌습니까? 우스운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만 정말 우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 말에 내가 그렇게 좌지우지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요?

  한번만 더 넓게 생각하면, 기뻐할 이유들이 더 많은데. 한번만 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세상천지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감사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우리를 오라 손짓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장님입니다. 남이 던진 한마디 말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우리를 작게 만든다면, 우리는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자기를 잊고 남을 향해 나아가는데서 옵니다. 시선을 자기에게 두지 않고 남을 향하기만 하면, 주님을 향하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주님을 향했던 사람들이 참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그분이 주시는 힘, 사랑의 힘, 믿음의 힘은 내가 아닌 타인을 향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작가 정채봉님이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사랑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시.


  사랑에도 

  암균이 있다

  그것은 ‘의심’이다.

   

  사랑에도

  항암제가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어쭙잖게 내 눈으로 확인하고야 믿겠다고 완고한 마음을 지니는 또 하나의 의심꾸러기 토마스들인 우리 자신에게 건네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건네시는 말씀을 들은 토마스는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의심을 버리고 믿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복한 사나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토마스의 믿음을 지닐 수 있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도 남을 향해 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시선을 나 자신에게보다 타인을 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 진복자가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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