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럽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에게 기도를 요청해 오는 형제자매들을 많이 만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을 만날 때, 나는 과연 그들이 어떻게 그 난관을 극복하며 무슨 힘으로 슬픔과 괴로움의 잔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바로 그들한테서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을 듣는다. “만일 제게 신앙이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기도할 수 없었다면 아마 한순간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요한과 야고보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지만,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결국 예수님의 잔은 그들의 잔이 되었고, 또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의 잔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잔은 원래 우리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소 그 잔을 받아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고통 받으시며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고통을 축복해 주시고 고통의 의미를 부여해 주셨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떠한 고통도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것은 없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시는 잔 안에 인류가 겪을 모든 고통과 슬픔과 상처를 담았다. 예수님도 당신의 잔을 앞에 두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하셨지만 사랑으로 그 잔을 끝까지 기쁘게 마셨다.
신앙이 우리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대신 겪으심으로써 완전히 제거해 주셨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직접 그 모든 고통의 일부가 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고통과 고난에 당신이 함께하기를 원하셨다는 데 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한테서 완전히 분리되어 홀로 고통 받지 않는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의 잔이다. 받아 마셔라.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라.”
우리는 예수님의 잔을 받아 마시며 그분의 삶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삶의 쓰디쓴 잔을 기쁘게 마실 힘을 준다. “네, 주님, 마실 수 있습니다!”
이상각 신부(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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