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6.1 연중 제9주일
신명11,18.26-28.32 로마3,21-25ㄴ.28 마태7,21-27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
오늘은 연중 제9주일이자
초록빛 생명으로 넘치는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의 첫날입니다.
생명은 축복이요 천부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무조건 보호되어야 하는 생명입니다.
사는 것은 지상명령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에 있습니다.
한 번 뿐이 없는 선물 인생을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막 살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단 하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몸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분명히 산상설교의 대미를
다음 말씀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기도 많이 하여,
미사 참석 잘하여,
성경 공부 열심히 하여,
봉사활동 잘하여,
좋은 일 많이 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청천벽력의 주님 말씀에
자기도취의 착각 속에 자족의 삶을 살았던
많은 믿는 이들의 애원과 항의가 곧 뒤를 잇습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자기 좋아서 하는 일, 누구는 못합니까?
주님은 하늘나라 입장 시 업적의 잣대로 재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의 잣대로 잽니다.
제 마음대로 좋은 일 많이 한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적게 일했어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냉정합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평생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았다 자부했는데
이런 말씀 듣는다면 얼마나 난감할까요?
전혀 아버지와 코드가 맞지 않은 삶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알 때
비로소 아버지와 코드가 맞는 삶이겠고
저절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은총이자 동시에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코드에 맞춰 살 때 생명이요 행복이요 축복이지만,
아버지의 뜻에 코드를 맞추지 않고 내 뜻대로 살 때
죽음이요 불행이요 저주입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듣지 않고,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저주가 내릴 것이다.”
그 옛날 모세 시대만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
세상 우상들에 현혹되어 삶으로
불행과 저주,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지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축복이요 행복이요 넘치는 생명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도 나를 알아 아버지와 완전히 코드가 맞는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몸소 실행하여 아버지와 하나 되어 사셨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 말씀을 통해
명쾌하게 밝혀주셨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모두 망라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말씀입니다.
참 행복을 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작은 계명이라도 충실히 지키는 게 아버지의 뜻이요,
화해와 극기가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되는 게 하느님의 뜻이요
정직하게 사는 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폭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삶,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모두가 아버지의 뜻입니다.
마음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를 충실히 실행하는 사람이 그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요,
진정 반석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쳐도
요지부동, 무너지지 않습니다.
날림 공사 건축도 문제지만, 날림 공사 인생 건축도 문제입니다.
안에서 무너지면 속수무책입니다.
우리의 내적 삶의 튼튼한 기초와 건축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은 필수입니다.
이래야 온갖 시련과 역경의 폭풍우 속에도 건재할 수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보이는 외적 건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삶의 건축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이 영광의 회복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의 실행을 통해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과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믿음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이게 바오로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민심에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읽어야 하는 위정자들입니다.
생명은 천부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공존공생, 공존공락입니다.
공존공생은, 공존공락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촛불시위의 이슈인
광우병이 우려되는 수입 소 반대,
대운하 반대,
민영화 반대 등등...
결국은 생명을 지키려는, 살기위한,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너무나 당연한 눈물겨운 저항입니다.
공존공생이, 공존공락이 모든 정책의 판단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실행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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