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월 13일 금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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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8-06-13 | 조회수799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6월 13일 금요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 마태오 5,27-32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언젠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이란 한 신부님의 회고록을 읽으며 많이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부여받은 사제성소에 대한 강한 확신과 자긍심을 지니고 열심히 살아가신 신부님의 삶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졌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이란 제목만 봐도 주님을 향한 신부님의 열렬한 사랑, 일생을 바친 순수한 봉헌,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 연상됩니다. 아직도 ‘긴가 ,민가’하는, 그래서 아직도 갈 길이 먼 저 같은 ‘잔챙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전에 저도 ‘평화신문’의 도움으로 강론 집을 한권 내게 되었는데, 제목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뭔가 느낌이 올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아저씨, 신부님 맞아요?’이거든요.
꽤 나이 지긋한 한 남편이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부인을 향해 큰 목소리로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당신은 내 영원한 짝궁 입니다. 내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또 다른 삶이 내게 온다하더라도 내 선택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표현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닭살이 조금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에, 그 일편단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그 누군가를 만나 한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한 대상만을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대체로 욕심이 많은 존재이지요. 근본적으로 한 대상에게 꾸준하지 못한 속성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비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건너다니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자신이 선택한 한 대상만을 바라보면서, 끔찍이도 위하면서, 끝까지 한 길만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결혼생활과 관련된 유다인들의 도덕적 기반은 많이 붕괴되어 있었고, 이완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인과 관련된 율법을 자기들 편 한대로, 자기들 위주로 해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득이한 경우 이혼장을 써주라’는 모세의 어쩔 수 없는 양보를 악용했습니다.
겉으로는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해나가는 것처럼 처신했지만, 아주 경건하게 살아가는 듯 했지만, 뒤꽁무니로는 엄청 호박씨를 깠습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위선적으로 살아갔습니다.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파악하셨던 예수님이 아니셨습니까?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적인 생활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6계명을 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현행범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정신으로, 눈으로, 생각으로 엄청 많은 죄를 짓고 있는 유다인들의 타락한 영혼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6계명에 대한 권위 있는 포괄적 해석을 내리십니다. 그간 불투명했던 6계명에 대해 정확하게 유권해석을 하십니다.
실제 현행법상 죄인이 아닐지라도 하느님 법으로는 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 고백소를 들어갈 때 ‘특별한 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실제 외적인 행동으로 저지른 죄도 죄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으로, 생각으로, 눈으로, 귀로, 입으로, 영혼으로 지은 죄도 똑같은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정신의 우위성, 내면의 가치를 강조하시면서 순수한 영혼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59번 / 세상의 참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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