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수치심을 아는 것 ....... [김상조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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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광자 | 작성일2008-06-13 | 조회수462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고”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2,25) 말씀과 관련이 있다. 음욕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지은후부터는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알몸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수치를 당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레위기 18장은 남녀의 치부를 드러내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원죄와 관련이 있다.
원죄를 짓기 전에는 알몸인 것이 아무런 수치심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원죄후 사람들은 알몸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나체족들이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수치심도 자주 겪게 되면 수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걸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죄에 무디어지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경계한 것은 이 무디어지는 마음이다.
무디고 단단한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어가지 못한다. 1독서에서 하느님이 엘리야 앞에 나타나는 방식도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 혹은 불속에도 계시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에 나타나셨다고 한다. 우리가 원죄를 지었지만 그 결과 하느님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수치심을 주셨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수록 우리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래서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눈이나 손이 부끄러움도 모르게 행동하지 않도록 아예 빼어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오리게네스라는 초세기 신학자는 거세까지 했다. 베네딕또 성인은 언제 어디선가 보았던 아름다운 여인 생각에 온 몸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하고,
프란치스꼬 성인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성인은 이 위기를 자신의 몸을 (장미)가시덤불에 굴려 온 몸을 피투성이로 만듦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권고는 얼핏 가학적인 행동을 부추기는 듯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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