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논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 그 백성 안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그 하느님 백성을 치유하십니다. 첫 제자들 역시 그 백성 안에서 부르십니다. 제자들 파견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은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 이에 동참할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의 이야기가 투영된 듯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병을 고쳤으나, 이스라엘에서 거절당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끝내 이스라엘 땅에서 시리아 북쪽 한 이방인의 땅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분리된 이후 자신들의 입지를 새롭게 규정해야 했고, 이스라엘과 결정적인 한판을 벌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르침과 복음 선포, 치유 활동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지금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며, 눈먼 두 사람과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신 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보살핌은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9,36ㄱ) 이 마음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마음으로 이로써 그들의 고통이 당신의 고통이 됩니다. 지도자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백성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36ㄴ절) 지도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해 섬김만 받으려 했고 자신들의 야심과 권력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는 대신 백성이 가진 것을 빼앗아 오히려 분열과 증오와 불의를 조장합니다.
시달리고 기가 꺾인 양들을 하염없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다 양들을 돌볼 일꾼이 필요함을 절감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37절) ‘수확’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더욱 폭넓게 선포하는 일과 백성의 필요를 채워줄 더 큰 기회를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수확을 심판과 연결시킨 바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3,12) 예수님의 메시지를 수용하느냐 배척하느냐에 따라 추수 때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추수할 것도 할 일도 많습니다. 제때에 수확하지 않으면 농사를 망칠 것입니다. 혼자 할 수는 없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38절) 수확할 일꾼들을 모으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더 많은 조력자를 보내 달라고 그분께 호소해야 합니다. 누가 이 일을 도울 것인가? 일손이 달린다고 아무한테나 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에 동참할 만한 사람들, 예수님이 시작하신 일을 계속할 사람들,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특별히 선택된 이들의 수는 ‘열둘’입니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열둘’이라는 숫자는 공동체,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체 이스라엘인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또한 흩어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한데 모으려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제자단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의 초석이요 미래 제자의 전형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위탁받은 제자들이 할 일은 예수님이 하신 바로 그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형상을 그대로 전수받는 것입니다. 제자 되는 것에서 결정적인 것은 신앙고백이나 제도적 형태가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그와 같이 살고 그와 같이 고난 받음을 말합니다.
그들을 가까이 부르신 예수님은 더러운 영을 쫓는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10,1)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4,19)로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권한을 나눠 받습니다. 이 권한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성령의 능력과 연결될 것입니다(사도 1,8 참조).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20; 12,28 참조)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5-6) 우선 하느님 백성부터 시작합니다. 시작은 단순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해야 합니다(7절; 3,2; 4,17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10,7) 이미 세례자 요한 역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3,2 참조).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는 회개가 빠져 있습니다. 제자들 자신이 회개해야 할 몸이기 때문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10,8) 이 일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 행위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 53,4ㄱ; 마태 8,17 참조) 예수님은 인간의 질병을 떠맡으셨기에 제자들도 그분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치유해야 합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자유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악의 배후에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에게 해주신 일들을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이르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세상은 예수님처럼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그윽한 연민의 눈길을 애타게 갈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거저 받은 만큼 거저 주기만 하면 됩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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