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러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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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8-06-15 | 조회수485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복음: 마태 9,36-10,8 비가 뿌옇게 내리는 날에도 그는 산에 간다고 나갔다. 그런 날에 어떻게 등산을 가냐고 해도 못 들은 척 하고 집을 나섰다. 산이라고 해야 아파트 뒷산을 말하는 것이지만 함께 다니려고 마음을 먹고도 학기 중에는 엄두를 못 냈다. 방학이 되면 가야지 하고 결심해도 막상 방학이 되면 또 게을러졌다. 어쩌다가 “같이 갈까?” 하고 따라 나서면 남편은 신이 나서 앞장선다. 아버님이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남편도 협심증 증세가 생겼다. 담배를 끊고 운동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듣고 등산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산에 다닌 것은 산이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 와서부터다. 산을 오르려면 천천히 시동을 걸어야 한다며 나 먼저 가라고 한다. 한참 만에 뒤돌아보니 가슴을 마사지 하면서 천천히 올라온다. 흰머리는 언제 저리 많아졌을까 마음이 쓰렸다. 산 중턱까지 오니 그제야 괜찮다면서 앞선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남사면. 이 끝은 이동면. 이 능선을 넘으면 저수지. 이 등산로 밑에는 연수원. 저기 보이는 골프장까지는 몇 시간. 이 길을 넘으면 음식솜씨 끝내주는 식당이 있다면서 연신 길을 가리킨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 온지 이 년도 채 안 되었지만 남편은 마치 그 동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마냥 산 속 구석구석을 환하게 알고 있었다. 혼자 지고 가는 배낭 속에서는 별의 별것이 다 나온다. 귤이며, 물이며, 방석이며 수건을 제 때에 맞춰 내 준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뭐가 필요한 지 귀신같이 내놓고 식구들이 좋아하는 걸 보는 것이 낙이었던 남자다. 맛있는 밥집을 알기만 하면 친정식구 시집식구를 번갈아가며 데리고 갔다. 어디서 좋은 것을 보면 언제나 세 몫을 샀다. 시집, 친정집 몫은 벌써 나누어주고 우리 몫만 들고 들어왔다. 시키지도 않은 그런 일을 해서 항상 나를 감격시켰던 남자다. 그런 남자가 나 모르는 산을 혼자만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산지기처럼 산에서 홀로 헤맨 시간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이다. 하던 일을 접고 새로 시작한 일도 잘 풀리지 않아 걸핏하면 산으로 올라가 홀로 보낸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었다. 남편의 뒤를 따라가노라니 문득 등산 용어, ‘러쎌’이 떠올랐다. 겨울 산에서는 누군가 먼저 눈길을 다지며 길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허리까지 쌓인 눈 위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기며 길을 터주는 힘든 작업을 ‘러쎌’이라 한단다. ‘그래, 언제나 저 남자가 우리 가족의 앞길을 터주었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함께 걸어온 길은 평탄하고 푹신푹신한 길도 있었고 까마득한 벼랑길도 있었다. 흡족하진 않았어도 아쉽지는 않았다. 그동안 허튼 짓을 한 적도 없고 한 눈을 판적도 없는 충실한 사람이다. 한꺼번에 어려운 일이 쏟아져 감당하기 어려웠을 때도 함께 짐을 나누어 짊어지자고 불평한 적도 없었다. 집안이 어려운데 교회봉사는 뭐 하러 다니냐고, 돈도 안 되는 신학공부는 왜 하고 있냐고 쓴 소리 한 번 해본 일도 없다. 그보다 더 지원해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남편이 이제는 혼자만 길을 내기 힘든 모양인지 거친 숨소리를 내뿜고 있다. ‘러쎌’은 원래 서너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앞장을 서야 한단다. 한 사람의 힘이 다 떨어지기 전에 그렇게 서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란다. 그래, 이제는 자리를 바꿔주어야 할 때인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했을 것을 그랬나보다. 차례를 바꿔줘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은 교회의 일 뿐이고, 그 일들은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이라 답답하기만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편의 뒤를 따라가는 내게서도 깊은 한 숨이 터져 나왔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신문사에서 인터뷰가 들어왔다. 늦은 나이라고는 하지만 신학대학을 졸업한 것이 별 대단한 일도 아니었거니와, 평신도가 수석을 한 것도 내가 처음은 아니다. 사제를 지망한 신학생들은 공부 보다는 인성과 영성 훈련에 더 많은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다른 과제의 부담에서 벗어나있는 평신도가 훨씬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인터뷰는 인터넷에 올려놓았던 묵상글 때문이었는데 그 일보다 수석졸업한 것이 더 크게 부각되어 민망했다. 신문을 보고 방송국에서도 인터뷰하자고 왔고, 여기저기서 글을 써달라는 요청도 왔다. 몇 달 뒤에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 코너까지 생겼다. 지금은 옛날처럼 말 그대로의 봉사만 할 수가 없어, 여러 곳에서 조금씩 받는 것으로 살림에 보태고 있다. 아직 남편을 대신해서 앞장 설 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부담을 나누고 있는 정도는 된다. 남편도 산에서 내려와 과거의 전적을 잊고,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하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한 동안 수고료를 받는 것이 정말 어색하고 마음 불편할 때가 많았다. 십여 년 동안 그야말로 순수한 봉사만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나를 잘 아는 신부님께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성전에서 봉직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양식을 얻고, 제단 일을 맡은 이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복음으로 생활하라.”는 말씀도 성경에 있다고 하시며 격려해주셨다. 그래서 이제 전처럼 다시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불편한 마음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정작 그분은 공짜로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해서 미리 글도 쓰고 학교도 가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에 사실 막혔던 앞길을 터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 지쳐 주저앉았을 때마다, 길이 순탄치 않아 뒤로 쳐져 있을 때마다, 그분이 보이지 않게 나서서 길을 터주셨던 것이다. 주님이 앞길을 터주시는 동안, 우리 네 식구 모두 숨을 고르고 있다. 힘을 축적해서 다시 하나씩 둘씩 교대로 나설 것이다. 모두들 각자의 몫을 하고 있으니 예전처럼 순수한 봉사를 하며 편안함을 느낄 날도 곧 돌아올 것이다. 올라갈 때는 험난했고 숨이 찼던 길도, 뒤를 돌아보니 평탄해 보인다. 굴곡이 많은 길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앞으로의 산행도 그분의 뒤를 바짝 쫓아 따라가련다. 눈보라 치는 겨울산도 그분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믿음직한 길잡이를 알고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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