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보가 되라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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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08-06-17 | 조회수815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 복음: 마태 5,38-42 어릴 때, 우리 동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맨 먼저는 아이들끼리 놀다가 주먹 싸움을 벌였다. 조금 후에 맞은 아이가 자기 형을 불러왔고, 그 중학생 형은 동생을 때린 녀석에게 복수를 해줬다. 그러자 큰 애에게 맞은 작은 아이가 울며 집으로 갔고, 곧이어 그 애 어머니가 쫓아 나왔다.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때리면 되냐고 훈계하다가 아이가 어른에게 꼬박꼬박 말대답을 한다고 따귀를 때렸다. 그 날 밤, 그 형의 아버지가 술을 먹고 찾아왔다. 식구들이 나와 옥신각신 하는 끝에 그만 집안 전체가 달라붙는 패싸움이 벌어졌다. 온 동네 사람이 말려도 안 되어 경찰차가 도착했을 때는 이 쪽 저 쪽 할 것 없이 모두 땅바닥에 죽은 듯 쓰러져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양쪽 다 똑같다고, 하마터면 줄초상이 날 뻔 했다고 혀를 차며 돌아갔다. 그 날 이후, 두 집안 다 동네에서 우셋거리가 되었다. 자기들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까지 슬슬 피해 다녔다. 이 원시적인 집안 대 집안의 싸움은 어릴 때 본 장면인데도 지금까지 눈에 생생하다. 아이들 싸움은 아이들의 선에서 그쳤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큰 집안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그 반대의 일도 흔하다. 즉 어른들끼리의 다툼을 아이들에게까지 대물림하는 경우다. 형제지간에 유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경우, 그 아랫대의 아이들끼리도 괜스레 서먹해지곤 한다. 어릴 적부터 친형제처럼 지낸 사촌들인데도 부모들은 아이들이 서로 가까이 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이들끼리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아이들은 아이들, 어른들은 어른들.”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있다면 미움은 대물림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사람들은 이런 병폐를 막고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을 만든 것이다. 동태 복수법이라 하는 이 법은 사실 과도한 복수의 폐해, 미움과 증오의 대물림을 끊어내고자 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만일 오늘의 말씀을 이 법에 적용한다면,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너도 그의 오른뺨만 칠 수 있다.”가 된다. 오른뺨, 왼뺨도 모자라 아무데나 마구 더 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에게 억울하게 한 대 맞은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 분한 마음을 풀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이 내게 주어졌다면 어떨까? 내게 주어진 권한으로 같은 쪽 뺨을, 딱 한대만 때리기 위해서는 온 몸의 힘을 손바닥에 다 실어서 뺨을 후려칠 것이다.
문득 어렸을 때 해봤던 매맞기 내기 화투나 윷놀이같은 것이 상상된다. 손목을 손가락 두개로 내려치는 것인데, 처음엔 살살 치다가 점점 강도가 더 해져서 나중엔 손목이 뻘겋게 될때까지 때리고 맞던 기억 말이다. ^^
아무리 똑같은 복수를 허락했다고 해도, 아무리 명쾌한 판정을 해준다고 해도 둘의 관계는 말끔해지지도 않고 끝까지 남은 앙금은 해결되지 않는다. 어느 때고 다시 파란을 일으켜, 보복을 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꿰뚫어보셨다. 아예 오른뺨을 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도 포기하고 오히려 자기 뺨을 친 상대방에게 다른 뺨까지 치라고 대주라는 것이다. 이어서 계속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그 모두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말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도 다 포기하라는 말씀뿐이다. 도대체 이런 어이없는 짓을 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실까? 잘 생각해보면, 이 어이없는 말씀의 열쇠는 바로 이 “어이없는”에 있다. 즉 나에게 공격을 하기 위해 잔뜩 준비하고 있는 상대방을 내가 반격해올 것에 잔뜩 대비하고 있는 상대방을 “어이없게” 만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안이 벙벙해서 준비한 무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게 만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빼기 작전이다. 허를 찌르는 작전이다. 그런데 이 김빼기 작전이 일시적인 꾀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야말로 “작전”임을 상대방이 알아차리게 된다면 첫 번에 준비한 공격의 몇 배가 되는 반격을 맞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어이없는 행동은, 진심으로 진솔하고 진심으로 순수하게, 진심으로 어이없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에게서 폭력의 사슬을 끝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인간의 폭력성의 심각함을 여실히 의식하면서 내리는 결단인 것이다. 결코 바보처럼 아무 생각없이 히히거리라는 말이 아니다.
완전한 비폭력과 비공격성을 드러내 보여야 상대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폭력의 악순환은 끊긴다는 것이다.
맨처음 어릴 때의 기억으로 되돌아가 본다. 최초의 어린 아이들이 싸울때, 주먹 싸움으로 어떤 한 아이가 맞고 들어왔다. 아이들이 놀다보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현명한 어머니라면, 그 집 아이들을 데려다 맛있는 것을 차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 아이에게도 주먹을 쓰는 일의 어리석음을 잘 타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날 그같은 망신거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 아이들이 자기들을 두둔한 형과 부모님을 두고두고 자랑삼았을까? 과연 마음 깊이 존경하며 살았을까?
그중 한 가정의 소식을 멀리서 알고 지내지만,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는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 우리보고 당장 바보가 되라는 말씀 같으나, 진정 오래도록 현명한 자의 처신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짧게 바보가 되고, 길게 현명하다면 왜 아니 따르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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