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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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8-06-19 | 조회수939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마태오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가장 탁월한 처방전, 기도>
언젠가 여러 수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각자 자신들의 기도생활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으로 그 나눔이 풍요로웠습니다.
“기도에 몰입하면 할수록, 묵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관상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처나 고통의 치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야말로 공동체 내외부의 다양한 갈등국면을 최대한 빨리 해소시키는 탁월한 처방전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예수님 시대 당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스승에게 기도 방법을 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당대 큰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런 흐름에 따라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지도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눈여겨보았던 예수님의 제자 역시 스승님께 기도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도문 하나를 하사하시는데, 오늘날 우리가 틈만 나면 바치는 ‘주님의 기도’의 원형입니다.
기도 중 의 기도, 공동체의 기도, 모든 기도의 기반이 되는 기도, 그래서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나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너무나 자주 바치다보니 거의 습관적으로 바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양한 전례 안에 반드시 빠지지 않고 ‘약방의 감초’처럼 ‘기본양념’처럼 들어가는 기도이기에 형식적으로 바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음미해보면, 사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 전반이 다 들어있습니다. 짧은 기도지만 그 안에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신앙인의 일상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만 정성껏 잘 바쳐도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건네주신 기도의 유산입니다.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이 밤낮으로 바치는 교회의 기도이자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적당히, 건성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신비 체에 합일하는 것이고,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 신음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기억하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그 기도 자체로 그들을 위한 위로와 사랑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나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 공동체와 함께 바친다는 마음으로 기도드리길 바랍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물결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창시자인 예수님과 함께, 온 교회와 함께 전 세계를 향해 기도 바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기도 바치는 사람은 기쁨의 순간에도 슬픔의 때를 생각합니다. 열렬히 기도 바치는 사람은 슬픔의 순간에도 슬픈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에 희망을 두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위주의 기도를 탈피하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내 만족을 위해, 나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감정으로부터의 탈피와 극복은 바람직한 기도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균형감각은 내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끔 도와주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보다 깊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318번 / 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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