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의 눈 [예수님의 힘] -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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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08-06-19 | 조회수65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야훼께서 남겨두신 민족들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족, 헷족, 아모리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과 섞여 살면서 서로 시집 장가 가다 보니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저희의 하느님 야훼를 저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겨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못할 짓을 하였다.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자,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은 또 야훼께 울부짖었다. 야훼께서는 한 예언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느님 야훼요 아모리인들의 땅에서 산다고 해서 그들의 신들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끝내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비의 일곱 살 된 살진 소를 끌고, 네 부하 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네 아비의 바알 제단을 허물고 곁에 있는 아세라를 찍어라. 그리고 이 산성 꼭대기에 너의 하느님 야훼께 바칠 제단을 차곡차곡 쌓아라. 그리고 그 살진 소를 잡고 찍어낸 아세라 목상을 태워 번제를 드려라." <구약성서 판관기 3장, 6장 간략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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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라' 이는 '누구인가'
바알 남신의 아내, 아세라 여신은 가나안에서 살던 이민족들이 섬기던 우상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고 난 후, 광야에서 그들이 섬겼던 야훼 하느님 대신에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농경문화의 풍요의 신(바알)과 다산의 여신(아세라)을 그들의 하느님과 동시에 섬기게 된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목축업에서 가나안의 농경사회로 변화함에 따라 이민족들과의 교류관계로 인해 이민족의 바알 신과 그의 아내 아세라 여신을 그들의 하느님과 함께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민족들과의 상호의존을 위해서 바알 제단(돌)을 세우며 다산의 아세라 여신(나무)을 바알 제단 곁에 두고 (바알의 아내, 목상) 이민족들과 같이 숭배를 하며 성적인 음행과 하느님을 '혼합 신'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현세적인 기복과 성적인 쾌락으로써 풍요와 다산(출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 광야에서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민족들과의 관계에 처한 그들의 현실적인 형편에서였다. 이민족들의 우상 신을 섬겨야만 광야(전쟁)하고는 별개의 복(풍요와 다산)을 달리 얻을 수 있다며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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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몸의 등불이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등불이 꺼지면 어둠을 물리치지 못한다. 몸이 어둡다면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눈은 하느님을 응시해야 한다. 만일 '영혼의 눈'이 현세적인 것들에 매여 있게 된다면 마음도 현세적인 것들에 매여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응시하며 참된 생명을 바라보아야 할 '영혼의 육신(몸)'이 끝내는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은 현세적인 삶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잊는다면 사람에게 주어진 천상의 축복은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동시에 바알, 아세라를 혼합으로 섬긴다고 혼합적인 두배의 복이 얻어지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기에 쉽게 유혹을 받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차마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두배의 복을 얻는다는 심증을 갖기 마련이다.
하느님 신앙으로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느님께 향한 '신뢰의 결핍'을 초래하는 것이다. 내세에서 뿐만아니라 또한 현세에서 더욱 풍족하기 위해서 기복신앙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참된 행복'은 오히려 그와 반대의 입장에 마련되어져 있다.
깨끗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을 요청하신다. 인간 존재의 깊은 심연이라고 하는 마음이 청정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보물을 땅(현세, 세상)에 쌓아 두지 마라'고 하신다. 죽음이 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현세에 집착해서 천상의 영복을 망각한다면 몸의 눈이 현세적인 유혹과 향락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 연유이다. 현실을 무시하고 현실을 악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하느님을 응시해야 하는 '영혼의 눈'을 맑게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혼합의 신'으로서 하느님은 없다. 하느님만이 사람 안에 사실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사람은 생명을 지닌다. '하느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눈'은 순결하시다. 예수님의 성체와 일치된 영혼은 '그리스도의 눈'처럼 아버지께 향한 그 마음도 순결하게 변한다.
인간의 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눈'을 마음에 지녔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가난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눈' , '그리스도를 보는 눈' 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아버지)을 줄곧 응시하게 된다. 하느님을 늘 바라보는 사람의 눈은 현세의 고난과 시련들을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극복해 가는 것이다.
두배의 복이 아니라 단일한 축복(그리스도)으로 하느님 안에서 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영혼은 예수님의 힘(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요한복음> 예수님의 힘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눈'은 '그리스도의 몸'(성체)의 등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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