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for his harvest.”
(Mt.9.37-38)
제1독서 호세아 8,4-7.11-13
복음 마태오 9,32-38
저는 지금 인천교구 사제연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참석하신 신부님들을 보면서 “참 많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하긴 지금 인천교구에 계신 신부님 숫자는 221명이니, 많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본당사목으로 또 특수사목으로 나누다 보면 신부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해집니다. 신부 한 명당 담당해야 하는 신자의 숫자가 2~3천 명 이상이 되기 때문이지요.
저 역시 본당사목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묵상 글을 쓰다 보니 사람들은 제가 강론을 별 어려움 없이 쉽게 준비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한 줄이 써지지 않아서 몇 시간씩 끙끙 맬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매일 글을 쓰고 책도 6권이나 썼던 제가 이 정도인데, 다른 신부님들이 강론 원고 준비하는 것이 쉬울까요? 그래서 어떤 신부님께서는 농담조로 이렇게 말씀도 하셨다고 하지요.
“강론만 하지 않으면 신부생활도 할 만하다.”
그렇다면 신부의 어려움이 이 미사 강론에만 있을까요? 각종 성사 집전은 물론 많은 신자들의 상담 역할까지도 해야 합니다. 또한 본당의 운영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에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까지 생긴다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한 신부님이 본당의 신자에게 멱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께서는 본당 신자로부터 주먹으로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는 소문도 전해 들었습니다(알아보니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힘으로 누르려는 모습은 사회 안에서나 자주 일어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그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도 보여 지고 있으며, 이렇게 세속화되는 모습 안에서 과연 성소자들이 늘 것인가 라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성향이 강한 요즘에 이러한 청을 하느님 아버지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또한 스스로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보다는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편하게만 지내려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요?
하느님이 높을까요? 아니면 세상이 높을까요? 분명히 하느님이 높다고는 말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왜 하느님의 일을 세상의 잣대로만 판단하려고 할까요?
하느님의 일꾼이 되는 사람은 바로 세상의 잣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이 이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내가 되고,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러니 수확할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화가와 구두수선공(최용우)
4세기경의 화가 아펠레스(Apelles)의 그림은 이 세상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그림을 따라 그린 그림을 통해서 그의 작품세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 세계 화가들이 인정하는 역사상 최고의 화가입니다.
그 유명한 아펠레스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림을 보게 된 구두수선공이 한 마디 했습니다.
"저런 모양의 구두는 이 세상에 없는데……."
이 말을 들은 아펠레스는 즉시로 구두 그림을 고쳐 그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대 화가가 그림을 고치는 것을 본 구두수선공은 신이 나서 또 말했습니다.
"손 모양도 이상하네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펠레스가 구두수선공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장 꺼져! 너는 구두 수선 전문가지 손 전문가가 아니야!"
Apres Un Reve - Masaji watanab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