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방인수도회 차원에서 일본 수녀님들과 문화 교류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며 서로의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지였다. 거창하게 꾸미기는커녕 폐허 그대로 둔 성지가 초라해 보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로 성당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열두 사도의 성상은 부수어져 있었는데, 복원하지 않은 잔해들이 어제 일인 듯 처참한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보존하면서 그 사건에 담긴 의미를 신앙으로 알아듣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뼈아픈 유배를 잊지 않고 그때를 대대로 되새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보았다. 일본의 박해는 우리나라보다 더 잔인했다는 사실과 긴 역사의 공백에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신앙의 역사에 대해 들으며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성 베네딕토 축일인 오늘, 복음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기 위해서 현재의 내가 누구이고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진 박해에도 우리 삶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일 때 끝까지 견딜 힘이 생긴다. 검증할 수 없는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결단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삶을 보여주신 분들이 성인들이다.
아버지의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 한 이들. 성 베네딕토는 그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기 위해 ‘기도하고 일하라.’고 수도자들에게 권고했다. 창조의 삶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또 다른 창조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상을 비범화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끈기도 인내도 부족하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받으리라는 확답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식별할 때 그분은 분명 참고 인내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성인들처럼 내밀한 자아 안에서 만난 하느님 체험만이 끝까지 참고 견디며 완성에 이르는 힘이 될 것이다.
기정희 수녀(춘천 밀알재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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