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강론 밀씀)
2008.7.20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지혜12,13.16-19 로마8,26-27 마태13,24-43
"하늘나라의 삶"
행복은 선택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 때 행복입니다.
환경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께서 지어낸 만물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알렐루야.”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미하라. 알렐루야.”
하느님을 찬미할 때 샘솟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 새날을 선물 받고
찬미의 노래로 응답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 지으신 모든 만물들,
숨 쉬는 것들 모두의 당연한 의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 때 참 기쁨에 행복입니다.
마침 오늘 복음도 하늘나라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할 때 실현되는 공존공생, 공존공락의 하늘나라입니다.
가라지의 비유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로
전개되는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대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양상은 달라도 이와 비슷한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성실히 착하게 살았는데 어찌하여 이런 불행을 주셨는지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가라지의 신비, 악의 신비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가라지를, 악을 뽑아 버리겠다는 종들의 말에
주인님의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힘들어도 끝까지 사랑으로 견뎌내며 공존공생 하라는 것입니다.
이 공존의 현실을 받아들임이 큰 지혜요, 큰 사랑입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어
이런 가라지를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주시니
하느님다운 자세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우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께 믿음의 뿌리 내려야 공존공생의 능력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했습니다. 어찌 보면 가라지로 상징되는 악들, 우리의 영혼을 단련,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없는 좋은 밀만의 밭,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아마 이런 인생 있다면
곧장 무기력증에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밭농사의 이치도 이를 입증합니다.
심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억세게 자라나
채소를 질식시키는 가라지와 같은 이 잡초들,
흡사 잡초와의 전쟁 같은 밭농사입니다.
이 잡초들이 없어 편안해 진다면 순조로운 밭농사일까요?
아닐 겁니다.
숱한 문제가 파생될 것입니다.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악을 상징하는 가라지 세력과의 전쟁입니다.
잡초만 제거하는 제초제를 아실 것입니다.
잡초를 죽이는 제초제처럼,
악만 죽이는 제초제 같은 약은 없을까요?
이 또한 좋은 해결책은 아닐 것입니다.
잡초만 아니라 땅까지 죽게 하는 제초제이기에
생각 있는 농부들 거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합니다.
가라지의 악은 도저히 깨끗이 뽑아 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악인들을 사형시켜도 악인들은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손대면 손댈수록 강해지는 악의 힘, 이래서 폭력의 악순환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선과 악은, 장점과 단점은
그 분별도 어렵거니와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어
도저히 악의 가라지나 단점을 뽑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찌 보면 선과 악은 한 뿌리에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여 선의 결핍이, 사랑에 굶주린 악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잡초를 제거하는 제초제 같은
악에 대한 처방은 아예 단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가라지를 뽑는 만용도 포기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밀을 가라지로 착각하여 뽑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을 냉철히 직시하여
밀의 세력을, 선의 세력을 보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래서 수행의 노력에 전념하는 수도자들입니다.
방심하면 곧장 무수히 자라나는 가라지의 악들입니다.
저희 수도원 야콘 밭의 그 왕성하든 잡초들
뿌리 뽑지 않고 베어주니 이제 야콘의 기세에 눌려
잡초들 힘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게 가라지의 악에 대한 유일한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악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사랑뿐입니다.
하여 성 베네딕도도
‘형제들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했지
형제들의 약점을 뽑아 버리라 하지 않았습니다.
또 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깨는 어리석음을 경계한 성 베네딕도입니다.
저 또한 형제들이 잘하는 것이 여덟이고 못하는 것이 둘이라면,
결코 못하는 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딥니다.
둘을 말했다가 위축되어 잘하는 여덟까지 못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악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내적 힘을 계속 보강해가는 것이 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희망으로
끊임없이 내적 성장과 내적 성숙의 삶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가 가르쳐주는 지혜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서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 노동과 선행의 수행으로
믿음과 희망, 사랑의 겨자씨를 키워내는 내적 성장 있을 때
저절로 가라지 악의 세력은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이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최고의 영적승리입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 합니다.
악을 상징하는 가라지 세력과의 영적 전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죽을 때 까지 평생 꾸준히 수행의 노력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 길 말고 악을 이기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하느님 은총으로
가라지 악의 성향도 밀의 착한 성향으로 바뀌어 질 수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끊임없이 기도와 노동의 수행에 전념합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역시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이
믿음과 희망, 사랑의 누룩을 활성화 시켜
우리의 삶을 내적 성숙으로 변화시켜 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세 비유들,
바로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임을 깨닫게 합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공존공생의 지혜와 사랑을,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는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야 하는
믿음, 희망, 사랑임을 배웁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말씀의 겨자씨와 성체의 누룩으로 오셔서
우리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북돋아 주시고
내적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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