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세상 종말에 관한 요한묵시록의 초현실적인 묘사를 떠올리는 섬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강렬하고도 실감나는 경고의 말씀은 어쩐지 좀 낯선 느낌입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는다고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 심판의 모습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드물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기야 성경의 묘사보다 더 끔찍한 참극을 이 지상에서 보고 겪은 인간들이니 ‘불구덩이’ 이야기의 충격이 반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의인’의 대열에 끼어들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 종말은 더할 수 없이 두려운 시나리오입니다. 들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게 만드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가사처럼 그 ‘진노의 날’에 온 세대가 바수어지고, ‘티끌로부터 부활한 죄인들이’ 영원한 처벌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모든 것이 기록된 책을 펼쳐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주님의 면전에 서면, 자비를 베푸시라는 애원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네 분으로 공사장에서 떨어져 전신마비로 오래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찾아뵙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래도 며칠 못 사시겠다는 어머니 이야기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거 무서워요?” 할아버지는 겨우 눈을 뜨고 “무서워.” 하셨습니다. “걱정 마세요. 착하게 사셨으니 하느님 곁으로 가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으시자 어머니가 다시 물었습니다. “쌓은 공덕이 없는 것 같아 그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평생 가난하고 병들어 살았으니 그걸 하느님께 바치기만 해도 다 용서받으실 겁니다.”
어머니의 그 이야기를 저는 내내 잊지 않습니다. 누구한테나 공로로 드릴 것이 있다고, 가난과 병고로도 자비를 구할 수 있다고 한 그 말씀이 얼마나 지혜롭게 여겨졌는지요. 당장 오늘부터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지만 가난과 병고, 누명의 억울함과 작은 희생이라도 내세워 천사의 손을 피할 수 있으려나, 위로를 얻어 봅니다. 기록된 책에 남아 있을 제 악행이 아무래도 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
여상훈(도서출판 시유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