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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옳지 않습니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02 조회수532 추천수3 반대(0) 신고
<옳지 않습니다.>(마태 14, 1-12)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크게 부각된 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관이었다.

 

한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위상황과 사람에 의해 줏대없이 살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간 헤로데라는 인물이다.


의인인 요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짧고 간단하게 요한의 삶을 표현하였지만 그 짧은 표현 속에 요한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전해주는 데에는 충분하다.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은 아주 짧게 끝났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메시지를 던져 줄 것이다. 반면 옳게 살지 못한 헤로데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추하고 비열하다. 길게 늘어 놓을수록 더욱 추한 이야기의 나열일 뿐이다.
 
요한 세례자는 패했고 헤로데는 승자같지만 정말로 승리한 이는 요한이고 패자는 헤로데이다. 죽은 이는 요한이요,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였지만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삶을 보면서 역사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당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승자이고 영원히 사는 길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럼 좀 더 요한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를 묵상하자.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삶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도 옳은 일을 하다가 반대자들에 의해 죽을 것이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의의 사람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변해주는 것이요, 그리스챤의 삶을 이야기 한다.

 

요한이 한 일은 옳은 일을 말하고 외쳤고 또 그렇게 살았다. 옳은 일 앞에서 죽음도 명예도 출세도 모든 것을 버렸다. 왜 그렇게 살았는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요한의 인생관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옳은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바로 의인의 삶이요,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흔들림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삶이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교회는 이런 순교자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며 이들을 聖人이라고 한다.

 

오늘 날 우리 교회는 이런 성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대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철새처럼 자기의 인생관, 가치관도 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고 저리 붙어 사는 삶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진리를 쫓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골베 신부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헤로데라는 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잠시 묵상하자.
헤로데라는 인물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헤로데라는 인간을 통해서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은 인간이 진리를 모를 때 어떻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헤로데는 자기의 권좌와 명예를 지키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자기에게 옳은 일을 조언하는 의인을 죽였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자기도 원치 않았지만 맹세까지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딸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고, 동생의 부인을 차지하는 불륜의 관계를 서슴없이 범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그의 부인인 헤로디아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헤로디아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혔고 그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인간으로 타락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자기를 얼마나 짖누르고 있는 가를 헤로데와 헤로디의 모습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요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안해 하였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헤로디아도 자기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의 늪에서 허우적 되고 있다. 사실 헤로데 임금이 베푼 잔치는 헤로디아를 위해서 베푼 잔치가 아니다. 그렇치만 요한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는 헤로디아는 그런 자리를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딸이 매춘부나 추는 춤을 추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추켰으며 또 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청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였다. 그로 인해 자기 남편은 물론 자기 딸마저 사람을 죽이는 공범자로 만들었다. 앙심을 품고 있는 한 여인의 무서운 생각이 결국은 자기도 죽이고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임금이 무슨 원이든 딸의 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요한 세례자를 감옥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자기와 다른 가족들을 가장 불행한 기회로 만들어 버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잔치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잔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기회가 자주 있는 법이 아니다. 좋은 기회를 잘 살리 수 있는 것,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그것이 성공하는 길이다. 좋은 기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을 살아서는 안되겠다.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바로 앙심을 갖고 살아가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인간이 불행해질 수 있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중에 내뱉는 말이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절대로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안 되고, 취중에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취중에 어떤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죄는 죄를 낳는 법이다. 모든 죄는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도 그랬고 헤로디아도 자기 혼자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과 딸까지도 죄를 짓게 만들었고 또 그들에게도 불행을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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