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도나 관습도 그 시대와 문화적 환경에 제약을 받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옛적에는 ‘신체발부수지부모’라 하여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이 효도를 다하는 기본이라고 가르쳤고 또 그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두발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교가 불효를 강요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효’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지만 ‘효’의 실천 방식에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부모님의 상을 치르고 시묘를 지내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특이한 사람으로 알려질 것입니다.
아무튼 바리사이들은 요즘 ‘잘나간다.’는 선생의 제자들 수준이 겨우 그 정밖에 안 되느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 제자들이 유다인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다를 게 무엇이냐고 하면서 선생을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율사들이 만들어 낸 전통의 괴리를 책망하시고(마태 15,39) 군중을 불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때문에 이 논쟁이 시작된 것을 아는지라 근심하며 예수님을 말리려 듭니다. “선생님, 그만 하시죠. 바리사이들이 열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한발 더 나아가 바리사이들을 ‘눈먼 이’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복음 23장에서는 이 ‘눈먼 인도자들’을 향한 더욱 신랄한 고발이 나옵니다.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내 삶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올바른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 우상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막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휘둘려 자기 자신 안으로 고립되는 것이야말로 경쟁 시대가 낳은 가장 심각한 우상의 유혹입니다. 이것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늘 깨어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이정석 신부(전주교구 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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