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포콜라레 모임에서 개최하는 ‘하루 마리아 뽈리’에서 한 어린이가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저는 제 동생을 업고 가다가 무서운 개를 만났습니다. 무서운 개에게 물릴까 봐 무거운 제 동생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었지만 동생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동생을 업은 채 도망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길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제자의 복음적 정의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따라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입시를 위해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던 팔레스티나의 척박한 땅과 소박한 밥상머리, 폭풍우 치는 갈릴래아 호수와 벌판이 그들의 학원이었습니다. 입시가 목적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라면 ‘참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가족과 소유를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분이 제자들이 선택한 새로운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새로운 삶에 어떤 전망을 제시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삶의 이유인 사람들 앞에 놓인 미래의 청사진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셨기에 제자들이 그분께 모든 것을 걸었을까요? 그 대답을 복음서 안에서 찾아보니 ‘박해와 죽음’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마태 5,11; 10,18.39; 16,25).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은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두 눈으로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골고타의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그분의 길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이제 선생님이 가신 그 길을 제자들이 걷게 됩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2코린 4,8-12)
예수님 때문에 차마 동생을 버리지 못하고 허둥지둥 달아났던 그 어린이는 그렇게 예수님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정석 신부(전주교구 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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