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회칠한 무덤(민중혁명)<과>완전한 가난(사랑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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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08-08-26 | 조회수499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영성적 가르침의 초점을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합일에 맞추고 있습니다. “순수 그리스도(게시자: 자기 안에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게시자: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모시는 것) 외에 다른 영적 진보의 길은 없다" 하느님 사랑이 영혼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 영혼의 절대적인 자아 포기와 깊은 겸손(게시자: 자기 안에 모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다. 관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은 은밀하고 평화롭고 ''내림의 사랑'' (게시자: 은총)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비추심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리라") 으로 얻게 된 비천한 자아 인식의 실상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인식이 나오게 된다. [게시자: 자기 비하와 자기 비참에 대한 얽매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성적 겸손을 얻게 된다.] 영성적 겸손으로 인하여 감성의 오만, 그리고 마침내는 영성의 교만에 딸린 일체의 악습들이 씻겨져서 영성의 길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시자: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 = ''삼위 하느님과의 합일'' / 의로움 / 완전함 / 거룩함 이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모신다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이를 ''그리스도의 이행'' 이라고 부른다. =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고린토6, 16 참조 ) 은혜를 받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영혼의 순결' (게시자: 영혼의 우상화를 없앰, ''순수 그리스도'')이라고 성인은 대답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에 이르기 전까지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십자가의 신비 (게시자: 자기 십자가를 짊,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이행'')를 몸소 체험하며 신앙의 깊이를 다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언어로 표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게시자: 십자가 사랑, 자기 비움, 완전한 가난)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머리에서 떠난적이 결코 없었다.
< 이상 영혼의 깊은 밑바닥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2008-08-21 오전 11:20:27 간략 줄임>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 "거닐다" = 그리스도께서 걸음걸이로 거닐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내) 가운데 내재하시기도 하고 초월하시기도 하며 투과하신다는 뜻입니다. '투과'라는 것은 들어왔다가 나감을 말합니다. 머무르심과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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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행, 그리스도(말씀)에게서 성덕의 빛이 오지요. 자신의 '어둔 밤'은 자신의 수덕(삶의 체험)에서 거쳐 지나는 것이지만 먼저 그리스도께서 빠진다면 이 '어둔 밤'은 영혼의 동물적인 탐식과 다를바 없습니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께 집중함으로써 (순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나 자신(자애심)을 버리게 합니다. 나 자신 안에 사랑(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소용돌이 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욕과 맛)들만이 자기 안에 꿈틀거리고 자기 자신만 커져만 가게 됩니다. 자기(자애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비우고자 하는 자신' => 곧, '자기(자아)가 있다' 는 뜻입니다. 어떤 자아인가 ? => '비우고자 하는 자아' 이지요. '비우고자' 하는 자아는 사실 '비우지 못하는' 자아에 묶여 버리고 맙니다. 자기 비움 => '완전한 가난' => '거저 주는 것' 입니다. / 남에게 주는 것이지요. 성인은 우선 우리의 감각적인 것('비우고자 하는 자기')을 영적인 것(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모든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합니다.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곧, 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망들에 대해 대항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성인께서는 신덕(믿음)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희망)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가르침이다고 봅니다. '자기 비움'은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의지가 묶여 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영지)고 묻는 것이 아니라, 거저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되지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 가운데'를 거니시지요.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진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 그후 나를 따라라'하신 말씀에서 사랑의 실천은 재물을 '악'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재물에 묶인 자애심)를 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자 하는' 이것도 재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신'은 '비우고자 하는' 것에 묶인 자기의 자애심이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런 자애심이 없는 '순수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억으로 파악될 만큼 형(形)과 상(象)을 지니지 않으시므로 기억이 하느님과 합쳐져 있는 경우에 형도 상도 없고 상상도 없어져서 망덕(그리스도와 일치이다면)으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면 기억은 오직 최고 선(하느님)에 빨려든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겸손, 순종이라 합니다. 아버지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가 이 의미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만 하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따름은 실천의 삶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삶이고 삶은 기도가 됩니다.
완전한 가난 .........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것' 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 자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기를 주는 것. 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심'입니다. 성체를 먹으라는 하신 것은 이런 완전한 가난, 거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없는 것이 가난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 없슴을 비움이라 하지 않고, 거저 주는 가난함, 거저 자기를 내어 주는 비움이 완전한 [ 가난, 비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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