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이후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촛불의 뜨거운 열기는 올바른 시민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통쾌한 표징이었다. 그런데 이 촛불을 처음으로 점화시킨 장본인은 알다시피 10대들이었다.
필자도 5월에 동료들과 함께 처음으로 촛불문화제에 참가했다. 그날은 촛불문화제가 시작된 지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촛불지킴이는 10대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나이 든 아저씨가 자신들 틈에 끼어 어색한 투로 구호를 따라 복창하는 모습에 호감이 갔던지 한 소녀가 내 손에 촛불을 건네주었다. 말없이 작은 미소와 함께 오간 이 짧은 순간의 통교는 지금 생각해도 기분 좋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언젠가 옛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배움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처음에는 인생의 선배들한테서 그들이 전승받은 지혜를 배우고, 두 번째는 동년배들 사이에 서로 겨루면서 배우고, 마지막으로는 후배들한테서 새로운 감수성과 통찰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릇 배움이란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라야 무르익게 된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교훈을 확증해 준다. ‘가려져 있던 진리’, 곧 동일한 진리의 보다 심층적인 차원은 ‘새로운 감수성’에 의해 포착되기 마련이다. 지하철에서 정신없이 문자나 주고받는 철부지로만 보였던 어린 세대들이 그들만의 소통매체로서 그 거대한 촛불의 군중을 만들어 낼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들이 처음으로 제기한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눈과 귀’도 열리게 되었다. 그에 맞물려 생명권이야말로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진리를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낡은 부대에 안주해 새 포도주 맛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험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지만, 그것에만 매일 경우 ‘경험이 사람을 우둔하게 만든다.’는 격언이 들어맞는 말이다.
이종진 신부(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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