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꾼’이 되고 ‘쟁이’로 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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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8-09-24 | 조회수61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성경의 숨은 이야기 ] ‘꾼’이 되고 ‘쟁이’로 살고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의 질문에 당혹했던 경험이 있으시지요? 답을 해 주기 무섭게 “뭐야?” “뭐야?” 하는 아이들의 무모한(?) 질문 공세에 어른들은 난감해지기도 하니까요. 저희 사제들이 어린이 미사에서 각별히 긴장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한데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아이들의 황당한 질문은 켜켜이 제의를 껴입어야 하는 사제의 여름을 진땀에 절게 합니다. 흔하게 사용하는 말일 경우에 그 증세가 더 심한데요. 쉬이 쓰이는 말도 그 뜻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은 탓입니다.
지금 저는 ‘꾼’이라는 의미를 사전에서 확인했는데요. ‘꾼’의 사전적 해석은 “어떤 일을 직업적, 전문적 또는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는군요. ‘노름꾼·씨름꾼·장사꾼’이 예로 나와 있고, 또 구경꾼이나 잔치꾼처럼 어떤 일이나 어떤 자리에 모인 사람을 뜻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잔치꾼’은 무어라 설명되는지 궁금해서 보니, 제가 가진 사전은 잔치꾼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잔치꾼은 아마도 ‘잔치를 위해 모인 하객’을 뜻하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 초대되는 이른바 ‘출연진’일 것도 같지요? (아, 이래서는 아이들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성경에는 많은 잔치가 소개됩니다. 그중에 으뜸이 카나의 혼인 잔치가 아닐까 싶은데요. 카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초대받았던 일로 우리에게 친근하고, 포도주가 떨어져서 난감해진 상황을 비켜가게 한 기적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잔치는 모두가 기쁜 자리입니다. 그렇지만 베푸는 기쁨, 누리는 기쁨, 돕는 기쁨이 함께 어우러질 때 가능한 일이지요.
‘카나의 잔치에서 성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채워 주지 않으셨다면…’ 하고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지금도 우리를 살펴 채워 주는 것이 적성이고 습관이며 본질이니까요. 다만 카나의 잔치를 통해 우리가 할 바를 짚어 보고 싶습니다.
복음은 잔치의 흥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 예수님을 담담하게 전합니다. 기적 후에 으레 따르던 찬미나 감사의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 솔직히 의아하고, 또 나서기 곤란한 아들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웃을 도왔던 성모님의 행위가 잔치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 2,10)라는 찬사와 감사의 말은 온통 신랑에게 관심이 쏠렸던 사실을 말할 뿐이니까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는 성모님의 말씀은, 설사 얼토당토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르라’는 암시를 넌지시 전하고 있는데요. 군말 없이 따랐던 ‘일꾼’들의 자세가 강조되는 이유이고, 또 우리가 그들의 순명을 놀라워하며 찔리는 까닭이기도 하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두 빛나고 광이 나는 일만 탐냅니다. 빛을 내기 위한 자기 소멸은 무시한 채 반짝일 궁리만 하고 있으니 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더욱이 소금의 노릇을 고작 상대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서 따갑고 쓰라리게 해 주는 것인 양 여기는 일도 흔합니다. 상대의 아픈 마음을 예리한 율법의 바늘로 콕콕 쑤시고 판단의 칼로 후벼 내고 짠 소금을 뿌려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르신 소금의 노릇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지요? 결국 자신만 옳다 하면서 상대의 흠을 찾아 도려 내야만 속이 시원타 하는 ‘성격 이상자’일 뿐이니까요. 주님의 뜻을 이렇듯 왜곡하고 있으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세상은 교회의 잘못에 결코 관대하지 않습니다. 타 종교인에게는 없는 잣대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는 곧잘 적용됩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로 실망을 표하고, ‘예수는 좋은데 그리스도인은 싫다’는 지적도 적지 않게 듣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도 믿지 않지만 그들의 영혼에는 이미 주인이신 하느님이 각인되었다는 표지가 아닐까요? 이성으로는 깨닫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지만 그들의 영혼은 ‘모든 인간이 이미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성모님의 무모한 당부에 순명했던 일꾼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곧고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깨끗하고 정의롭고 고귀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뜻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되새기게 하고, 어깨를 무겁게 하고, 그래서 삶의 한 폭을 도약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빌미가 됩니다. 생각해 보면 참 고마운 일입니다.
세상이 본능적으로 하느님의 사람에 대해 기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또 힘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이름에 먹칠할 수 있고 그분의 뜻을 말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니까요.
▒ 부산교구(안식년)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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