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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아들이 있는데...(성거산지기 신부님 연중제26주일 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02 조회수552 추천수1 반대(0) 신고
 
 
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성거산의 야생화
 
 
  

두 아들이 있는데/마21:28-32


1. 비유의 배경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결국 기존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지적하면서 이에 모호한 입장에 있었던 그들을 궁지에 몰아  넣으십니다. 곧 이어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종교성을 신랄하게 책망하십니다.


2. 비유의 내용

두 아들의 비유는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라는 물음으로 마칩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고 하자 맏아들이 "예, 가겠습니다."하고 대답만 하고는 가지 않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가서 같은 일을 시키자 작은 아들은 "싫습니다."하였지만 그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둘째라고 대답했고, 이에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난 유대 지도자들은 치를 떨게 됩니다. 주님은 세리들과 창녀들, 즉 버림받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인정하심으로써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허세와 위선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3 두 아들 비유의 중요 메시지

본 비유에서 교훈하는 핵심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가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옳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뉘우침 즉 회개가 본 비유의 중심 메시지인듯 합니다.

작은 아들이 처음에는 싫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갑니다.

맏아들이나 작은 아들 모두 불완전했지만 맏아들에게는 뉘우침이 없는 반면 작은 아들은 뉘우쳤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이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동시에 회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으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 하였다“고 지적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즉 요한이 보여준 옳은 길이란 회개의 길을 의미한 것입니다. 뉘우침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그 첫 번째 단계입니다. 뉘우침 없이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셋째는 중심 교훈은 위선에 대한 책망입니다.

맏아들은 가겠다고 하고서는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착하고 순종하는 아들이었으나, 실은 악하고 불순종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위선이란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던 것을 놓치지 않고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넷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입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 즉 구원을 얻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창녀들과 세리들은 뭇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되고 지도자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정욕과 향락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요구를 싫다고 거절하였지만, 그 후에 요한의 설교를 듣고 난 "세리와 창녀는 믿고...(32절)" 하느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이들이 유대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복음의 비유를 좀 더 확대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대하는 아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예, 가겠습니다."하고서 실제로 가서 일하는 아들.


둘째는 "싫습니다."하고서 실제로도 가지 않은 아들이요,


셋째는 작은 아들처럼 "싫습니다."하고서는 그 뒤에 뉘우치고 가서 일한 아들이요.


넷째는 맏아들과 같이 "예, 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으나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첫째의 경우와 같이 가겠다고 대답하고 실제로 간 아들은 가장 착한 아들인 반면, 싫다고 대답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은 가장 악한 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에서는 이처럼 완전한 악과 완전한 선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불완전한 두 아들 만이 나타납니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들이지만 회개하고 순종하였으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착하고 선한 척 하였으나 실제로는 불순종한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악과 선이 공존하므로 어떤 사람도 절대로 선할 수 없으며 동시에 절대로 악하여 하느님께 돌아올 수 없는 자도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의 작은 아들의 비유와 더불어 하느님께 돌아와야 하는 인생의 바른 모습은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행해야 할 인간의 본분은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섰던 자가 뉘우치고 회개하여, 위선과 허위를 버린 채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곧 구원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자라면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행복을 추구하고, 또 행복할 권리가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사는 신앙인이라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어디 완전히 행복한가? 아니면 그리스도인 모두가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복음의 비유를 통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말만 무성하고 행동은 없는, 풍성한 말에 비해서 사람다움의 행동과 실천이 없어 날로 황폐화 되어가는 모습을 인간 상실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맏아들과 같이 “예”라는 대답만 있고 행동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종교 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종교적 위선은 사람을 피곤하고 괴롭게 합니다. 개인적인 사리사욕은 여지없이 챙기면서 마치 자선가나 되는 것처럼, 거룩한 사람처럼 대우받고자 하는 허욕과 욕심 때문입니다.


1)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예라고 말 했으면 어김없이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도자가 아쉽습니다. 우리 사회에 <예>와 실천적 순종이 함께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행복과 평화가 깃들일 것입니다.


2)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하였으나 그 뒤에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하므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뉘우침은 회개요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자기 회복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창피해도 회개하고 돌아설 때 생명이 있고 거듭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높은 도덕생활은 우선 먼저 뉘우침에서 시작됩니다. 한 나라의 국력은 그 나라 백성들의 도덕 수준과 정비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국민의 도덕 수준이 나라의 행복지수와 국력에 그 만큼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 입니다. 정치인, 경제 기업인, 심지어 교육자나 종교인마저 부패하고 거짓과 부정이 가득하다고 하면 나라는 불행해 질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의 실존적 의미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기 전에 참 자유와 행복이 불가능한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였기에 아버지와의 만남이 가능했습니다. 비록 창녀와 세리 같은 죄인이었으나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행동 정신은 세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근면한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근면한 삶을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심지어 잡수실 겨를도 없었다고 성서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민자 야곱도 그 스스로가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밤낮 열심히 일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정직한 생활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정직할 때 믿음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고, 사람 앞에 정직하고, 자기 스스로에게도 정직해야 합니다.


자연처럼 정직한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정직하심이 피조물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나라의 경제 상태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리하여 경제 회복이 급선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정직한 도덕생활의 회복입니다. 도덕성 회복 없이 경제 회복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죄악과 향락의 문화가 더욱 심화되어 인간 사회가 도덕성이 없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은 경제 회복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사람이 되고서야 경제도 필요한 것이지 인간성을 상실하고서야 경제 회복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인간이 참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라는 말만 있을 것이 아니라 순종함이 있어야 하고 순종함이 없었다면 뉘우침으로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뉘우침이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 미사 중에 은총을 청하면서 미사를 봉헌 합시다.

 

 ♧성거산지기 정지풍아킬레오신부님ㅡ2008. 09. 28 (연중 제 26주일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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