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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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08-10-08 | 조회수59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까 11,1-4)
-유광수신부-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제자가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듯이 우리도 오늘 '기도하는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하자.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우리가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하고 싶은 원의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보고 기도하라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늘 기도하셨지만 한번도 제자들보고 기도하라고 하시거나 아니면 내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하고 서두르지 않으시고 당신 혼자 묵묵히 기도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의 교육적인 방법이다. 사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제자들, 기도를 한번도 해보지 않은 제자들보고 무조건 기도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한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도하겠는가?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전에 먼저 당신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셨고 궁금하게 생각하도록 하셨다. 드디어 참다못해 제자들이 나서서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루가는 다른 복음서보다 기도에 관한 부분이 제일 많이 기록하였다. 그마만큼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도에 관한 이 부분을 자기 복음의 첫 부분이 아닌 중간 부분에 갖다 놓은 것은 루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즉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관심이 없이 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 없이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신 것이다. 열망은 기도를 잘 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할 조건이다. 이 조건이 채워졌을 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기도하는 방법의 첫째는 기도의 분위가 즉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라고 아버지를 처음에 갖다 놓은 것은 누구에게 기도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께 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아버지 앞에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다. 즉 기도는 아버지와 자녀의 만남이요, 대화요, 느낌이요, 확인이다. 삶을 나누는 것이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아버지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 나보다 더 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더 잘 아시는 분, 지금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할 때 내가 알 지 못하는 낮선 분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내가 일일이 말을 하고 설명을 해야 알아듣고 그때서야 당신 마음에 내키면 기도를 들어주시는 인색한 분이 아니다. 내가 혹시나 잊어버리고 청하지 않았으면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잘되었다고 하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나의 청 때문에 성화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나의 청을 억지로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큰 소리로 많은 말을 해야 그 때서야 알아듣고 귀찮아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정말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올바로 알고 기도한다면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노력한다. 즉 나의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루가 15,31)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또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만을 찾고 나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 즉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와 하나되지 못하고 아버지와 나와 늘 떨어져 있고 분리해서 기도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했으면서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것이 우리가 청해야할 아버지의 나라이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기도하면서 청해야할 아버지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것,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청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모두 나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기도의 모습인가? 아무리 아버지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싫으면 내가 고통을 당하거나 손해를 봐야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것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오늘 나의 일용할 양식이다. 오늘 우리의 양식은 빵이든 밥이든 그것은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들이지 나의 나라를 위해서 청하는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늘 청하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욕심을 부려 갖기 위해 청한다. 이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로는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늘 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다. 유혹이란 바로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생각들과 행동들이다. 우리는 이런 유혹을 늘 받고 있고 또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오늘 이 기도를 바치면서 적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머물어 보고 아버지께서 오늘 나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자. 아니 이용할 양식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보자.
무슨 기도문이 그리 많은지 우리 주위에는 기도문이 너무 많다. 그 기도를 다 바치려면 시간 반 또는 두 시간 걸린다고 한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다 좋은 내용들이고 다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내용들이다. 가정을 위한 기도, 연령을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전 건립을 위한 기도, 수재민을 위한 기도, 통일을 위한 기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예수 성심께 바치는 기도, 묵주의 기도, 등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도문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왜 그렇게 일일이 조목조목 나누어서 기도를 바쳐야 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준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한 가지 뿐이데 즉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라는 것뿐인데 우리의 기도문을 보면 책 한권이 모자란다. 정말 기도를 올바로 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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