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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9일 야곱의 우물 -요한 2, 13-2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09 조회수500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3-­22)
 
 
 
 
요한은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가지 표징을 사용해 보여주는데, 카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 사건이 이에 해당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도 전하지만 거기엔 예수님의 수난이 임박한 시기이고, 여기서는 공생활의 시작, 곧 복음서 맨 앞쪽에 배치되어 있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역사적으로는 더 정확한 편이지만 요한복음은 나름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표지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2,13) 예수님께서 참된 파스카의 표지를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넌지시 비춥니다. 이스라엘 삼대 순례 축제인 과월절(파스카)·오순절·초막절이면 열세 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파스카 축제를 세 번 맞이합니다. 세 해에 걸쳐 공생활을 보내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로 나뉘는데 이스라엘인의 뜰에는 선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십니다.(14절) 성전이 장사치들로 들썩이는 시장바닥 같습니다. 데나리온이나 드라크마에는 유다인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새겨 있어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세켈로 바꿔야 했습니다. 환전꾼들은 여기서 약간의 이익을 챙기고 동전을 교환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염소와 양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비둘기들은 정신없이 파닥거리며, 사세요 파세요 하는 흥정과 돈 바꾸는 소리가 성전 뜰에 가득합니다.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은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꾼들이 벌려놓은 상을 뒤엎으십니다.(15절)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셨나 봅니다. 이렇게 화내시는 예수님 모습이 낯설기만 합니다. 늘 따뜻하고 다정다감하셨는데…. 예수님께 성전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시편 69,10) 분노하실 만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말로만 명령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의 제물입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을 실현하십니다. “그날에는 만군의 주님의 집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없을 것이다.”(즈카 14,21) 예수님은 모든 것을 성전에서 쫓아내십니다. 시장 바닥은 좁고 시끄럽고 더럽고 무질서한 것이 어울리는 곳이지만, 성전은 넓고 고요하고 편안하고 경건한 곳이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놀라 반문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18절) 유다인들은 합당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한 요구에 예수님이 꼭 응답하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유다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뒷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표징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전 정화 사건을 계기로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논쟁 대목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으로 요한 특유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둡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재건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 대왕이 사십육 년이나 걸려 증축한 것입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20절) 유다인들이 생각한 성전과 예수님이 생각한 성전은 서로 다릅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사흘’ 안에 보여주시겠다고 장담하십니다. 그들이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1절)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죽음으로 ‘파괴되었다가’ 부활로 ‘다시 세워질’ 예수님 자신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말씀을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겠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2절)

성전은 하느님이 계시고 나타나시는 곳입니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곧 성전이십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그분을 통해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통해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성전 정화 이야기는 구원의 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성전 정화 사건이 인간의 내면에서 실현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의 주제는 정화입니다. 시장 바닥 같은 성전은 한편으론 인간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제물의 피로 성전을 정화하듯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 육신과 내면의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특히 인간 존재를 기만하는 온갖 것에서 우리를 정화하셨습니다. 인간 내면에 뿌리내린 죄와 충동과 욕심 등 나쁜 모든 것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내적 무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육신도 내면도 다시 회복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 됩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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