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 영혼의 성전(김웅렬토마스신부님 32주일 강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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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월순 | 작성일2008-11-14 | 조회수975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일몰의 성지..청솔매가 종탑 꼭대기에 앉아 있군요.. 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성지에 와서 불편함 때문에 성모님이 여러분을 불러주신 목적을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매일같이 이곳에 천 명 가까운 분들이 오십니다. 또 기도찬미의 밤에는 천 몇 백 명씩 옵니다. 그러면 성당의 크기는 한계가 있고, 그 많은 분들이 첫 토요일 날을 지키려고 그 전날부터 와서 자리를 맡아 놓는데 그날 오후가 되면 싸움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대성전을 하루아침에 짓는 것도 아니고..... 내년 봄부터 저 운동장에 야외제대를 차려서 첫 토요일을 지내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이 성지를 향해 떠났을 때부터 마귀가 같이 따라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 얘긴 뭐냐? 마귀는 여러분들이 은총을 받게 그렇게 만만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오만 방법을 총 동원해서 성지에서도 분노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싸움질까지 하게 만들고, 순례도 못 끝내고 중간에 돌아가게 만들고, 집에 가서도 땅을 치게 만드는 겁니다.
이곳은 빛이 강한 곳이기에 사탄의 계략도 만만치 않습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진한 겁니다. 은총을 받고 난 후에는 침묵 가운데 사셔야합니다. 순례 갔다 와서 은혜 받고 난 다음에 사탄은 우리의 입을 통해서 시궁창에 다 쏟아 붓게 만듭니다. 피정하기 전보다도, 순례 갔다 오기 전보다도 오히려 영혼의 상태가 더 비참해질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앞으로 갈 때는 군인이 전쟁터에서 경계를 하듯이 늘 앞뒤 좌우를 살피면서 어둠이 내 영혼을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가로막지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은 베드로 대성당이 로마에 생기기 전에는 가장 큰 성당이었고 지금도 로마 교황님의 주교좌성당은 베드로성전이 아니라 라테라노 성전입니다. 그래서 모든 큰 행사는 라테라노 성당에서 하죠.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은 바로 내 몸을 두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와있는 이 성전도 언젠가 허물어집니다. 베드로성전도 언젠가 허물어질 것이고 라테라노 성전도 언젠가 허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지은 집은 언젠가는 허물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얘기하신 ‘성전이 바로 내 몸이다.’ 몸이라 하는 것은 영혼도 그 안에 포함이 됩니다. 내 영혼 안에 지은 하느님의 성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격투기 하시는 양반 같아요.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고 서슬이 시퍼렇게.....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서 후려갈기고 아~ 용감해요. 예수님께서 또 언제 화내셨어요? 베드로 사도한테도 ‘이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시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한테도 ‘이 독사의 족속 같은 놈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놈들아!’
예수님은 얼마나 용서하라고 하셨죠? 일곱 번에 일흔 번? '곱하기 해서 490번까지 용서하고 490번 이후는 용서하지 말아라~~' 그런 의미는 아니죠? 무한히 용서해라 하신 그분인데, 놀랍게도 성서에 보면 여러 번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의노라고 그래요. ‘의로운 화’ 우리들의 하는 분노는 ‘짜증’ 다른 거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상이라든지 조직, 그 어떤 체계라도 목숨을 걸고 싸우셨어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해야 될 때 그것은 ‘의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화’ 보통 ‘짜증’을 부립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의노’는 ‘이타적인 화’입니다.
우리들은 고 순간을 참으면 덕이 되고 공로가 되는 것을 못 참고 분노해서 성지에 와서까지 멱살을 잡고 싸우고 간단 말이에요. 정말 분노해야 될 때는 비겁함 때문에 꼬리를 딱 내립니다. 여러분들,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양심껏 천주교 신자로써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준적이 생애에 몇 번이나 됩니까? ‘저게 왜 내일이야?’ 길에서 깡패들에게 사람이 맞을 때도 그 주변에 수백 명이 지나가면서도 구경만 하면서 ‘저거 내가 왜 간섭해? 저놈이 나한테 해코지하면 어떻게 해.’ 정말 참아야 될 것은 못 참고, 정말 의롭게 분노해야 할 것은 분노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늘상하는 그 짜증과 예수님의 의노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됐던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을까? 현재 나는? 내가 사는 모습을 주님이 보신다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 아니면 2천년 전에 하셨듯이 내 앞에서 의노를 보이셨을까?
예수님은 네 가지 부류의 인간들 앞에서 가차 없이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첫 번째 위선자들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말과 행위가 다른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저도 입만 열면 좋은 말을 하는 사제이고, 또 사제 중에서도 피정을 전문으로 하는 사제이니 얼마나 좋은 말을 많이 했겠습니까? 솔직히 제가 하는 말 다 못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나를 볼 때, ‘신부님은 당신이 강론 대에서 하시는 말,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하셔.’ 하는 평가는 받아야 위선자가 아니죠.
예수님은 위선자들 앞에서 의노를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어주면서 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준 작은 상처에는 분노하면서 지가 다른 사람에게 준 수십 번의 칼질에는 눈물 한 번 안 흘리고 회개한 적이 없었던 위선자들..... 본당의 좋고 큰 간부직, 오만 것 다 맡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 하느님 앞에는 쥐꼬리만큼도 봉헌하지 못하면서 남 봉헌하는 것은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 생전 몸 바쳐서 봉사 한번 하지도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봉사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깎아내리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자들이 위선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위선자들에게 가차 없이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두 번째 의노의 대상이 됐던 족속들은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말로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그 뜻입니다.
꽃동네에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버려져있습니다. 꽃동네의 목적은 꽃동네를 없애는 것입니다. 꽃동네가 있기 때문에 내 십자가려니 하고 살았던 똥오줌 싸는 시아버지 갖다버립니다. 내 팔자려니 하고 데리고 살아야했던 뇌성마비 걸린 내 자식새끼도 팔다리 묶어서 꽃동네에다 갖다 버립니다. 지 십자가 남한테 맡기는 겁니다.
저는 늘, 제가 보좌신부로 옛날에 오신부랑 같이 살았을 때도.... 꽃동네의 목적은 꽃동네가 없어져야 되는 것이며 내 십자가려니 생각하고 가족들이 끌어안고 살게 해야 하는 것이 꽃동네입니다. 꽃동네가 커진다고 그것이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결코 아닙니다.
한겨울에 꽃동네 봉사자들과 같이 후레쉬를 들고 풀숲을 뒤져보면 할아버지가 이불에 뚤뚤 말려가지고 팔다리 묶어서 입에다 파스 붙여서 숲속에다 택시기사한테 돈 몇 만원 줘서 갖다 버리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어디서 왔어요?’ 치매할아버지라 집도 모르고 이름도 몰라요. ‘며느리가 창경원 가자고 그래서 왔어.’ 열흘 뒤에 어떤 여자가 “혹시 이런 할아버지 안 들어 왔어요?” “들어왔다...며느리가 갖다 버렸다고 하는데...니 년이 버렸구나!” “아니에요, 저는 며느리가 아니고 딸입니다.” “어떻게 알고 찾아 왔수?” 꿈에 친정아버지가 그렇게 힘들어 하는 모습으로 보이더래요. 그래서 올케한테 전화를 해서 “친정아버지 잘 있어요?” 했더니 “잘 있어요....” 하면서 얼버무리기에 “아버지 좀 바꿔 줘요,” “지금 주무세요.” 기분이 이상해서 올라가 보았더니 아버지가 안 계셔서 오빠 보고 “아버지, 어디 있어?” “응, 온천에...” “어디 온천? 대.” 친정아버지는 치매가 와 가지고 딸 며느리도 구분을 못해... 그냥 둘이 붙들고 울고
꽃동네는 정확히 말하면 고통네.... 꽃동네가 아닙니다. 꽃동네는 없어져야 하는 동네입니다. 말뜻을 알아들으시겠지요?
내 가장 가까운 친정아버지, 친정엄마...내 이웃 가족들에게 무관심하면서 본당에서 활동을 한다면 그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울고불고 난리치는 것 보면..... 정말 효자들은 속으로 웁니다. 그렇게 안타깝고 힘들어 할 것을 어머니 병상에 계실 때에 머리 한 번 더 못 감겨 드리고 왜 한 번 더 못 찾아뵈었어? 죽은 다음에 위령미사 바친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아시지요? 온 몸이 헌데 투성이 라자로를 부잣집 문 앞에 버려놓아요. (사실은 그것도 동네사람들이 지 책임 떠넘긴 거지요.) 그 옛날 유다인 부자는 밥 먹기 전에 식빵으로 손을 닦고 식탁에 버리면 개들이 와서 주워 먹었는데 부자는 손 닦고 버린 식빵으로 문간 앞에 있는 라자로를 먹여 살리면서 “야훼시어, 저 놈은 나 아니면 죽을 놈이지만 내가 먹여 살리고 있소!” 나중에 죽어서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할아버지 품에 안겼지요. 부자는 다니면서 라자로에게 욕설을 한 적도 없고 발로 찬적도 없어요.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라자로에게 악을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못 베풀었기 때문이에요. 무관심의 죄는 지옥에 떨어질 만큼 큰 것입니다.
우리 흔히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 성서 어디에 착하게 살면 천당에 간다고 합디까? 적극적인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능동적인 선을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관심하게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한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세 번째 주님 의노의 대상은 하느님 법보다 자기 법에 더 얽매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지가 가지고 있는 잣대가 다 다릅니다. 그 잣대를 가지고 남편을 재고, 이웃을 재고, 본당신부를 재고.... 문제는 그 잣대가 맞는 눈금이냐? 맞지도 않는 눈금을 가지고 오만 사람을 다 잽니다.
하느님의 법보다 자기 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 늘 남을 많이 판단합니다. 두 번째 이런 사람일수록 콤플렉스가 많기 때문에 가슴 속에는 분노와 화가 많습니다. 상처가 많습니다.
우리들의 법은 성령의 불로 태워서 그리스도의 법이 그 안에 들어가야 겠지요? 예수님의 법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관용입니다.
늘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예수님의 법은 말을 적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먼저 기도하는 겁니다. 남에게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주모경이라도 바치고 늘 입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은 사람 모이는 곳에 가기 전에 묵주기도 한 단이라도 봉헌하고 고백성사거리가 늘 입으로 짓는 죄 때문이라면 사람들 만나기 전에 반드시 화살기도 쏘십시오.
네 번째로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착취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런 내용일겁니다. 유다인들은 19세 이상이 되면 과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려면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장료, 즉 성전세를 내야 됩니다. 성전세가 그 당시에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틀 임금인데 일반 화폐로는 성전세를 내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전화폐 1000원짜리로 바꾸려면 일반화폐 3000원을 주어야 하니까 환전상들이 그걸로 폭리를 취하는 거예요.
또 성전 안에 들어오면 자기를 위해 대신 죽어줄 비둘기, 양..... 즉 대속물을 바쳐야 하는데 보통 서민들은 비둘기를 집에서 일 년 내내 정성스럽게 키워서 안고 오면 그것을 검사하는 사제들이 장사꾼이랑 짜고 “아, 이 비둘기 부정 탔구먼...퇴짜” “염소 뿔이 부러졌구만, 퇴짜“ 밖에서 가지고 오는 짐승들은 퇴짜를 놓으면서 성전 안에서 파는 대사제 가야파의 직속 장사꾼들이 파는 짐승을 사야만 통과를 시켰어요. 문제는 비둘기 한 마리 값을 시중의 10배 이상 받으면서 독점과 폭리, 횡포와 부정이 성전 뜰 안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지요.
예수그리스도 어떻게 했습니까?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꾼들을 때리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으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지 말아라!“ 가야파가 화려한 성전에서 보고를 받아보니까 나자렛에서 온 방랑교사라고 하는 놈이 “어쩌구 저쩌구~~ ” 떠들면서 우리 조직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명을 재촉하신 겁니다.
“회칠한 족속들아....못 된 바리사이 족속들아!” 하는 것까지 참아주었는데 이제는 대사제들의 돈벌이가 되는 것까지 시비를 걸고 늘어지는 저걸 더 이상 살려두어서는 안되겠다... 작전을 짜라! 거기에 걸려든 인간이 바로 유다스였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은 눈에 보이는 집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영혼이라고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언젠가 허물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기둥기둥마다 황금으로 된 줄기가 돌아가고 포도송이 하나가 1미터 50이 넘어서 멀리 20리 밖에서도 예루살렘성전을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지만 로마 군인들의 전차말발굽에 밟혀서 폐허가 되었으며 돌멩이 하나 제대로 선 것이 없이 사라졌습니다. 100년 동안에 걸쳐 지은 성전이라도 세찬 지진이 한 번 일어나면 다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삶은 고작 6~70년이지만 그 육신 안에 깃들었던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한 성전 속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성전입니다. 과연 내 성전은 깨끗한가! 예수님께서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서 “베드로야, 너 어찌 네 영혼을 이 꼬라지로 만들고 살아가느냐!” “루시아야, 너 왜 이렇게 사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노를 보이신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위선자들에게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가장 가까운 내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하느님법보다 자기 법에 얽매어서 한 평생을 남을 판단하고 분노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의노를 보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을 착취하는 사람들에게 의노를 보이셨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미사 때마다 썩어 문드러지는 우리의 영혼에 천상의 약이 되어 온다는 것을 깊이 명심합시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8. 11. 9 (연중 제 32주일)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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