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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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작은 요한아(마리아 발또르따 애칭), 많은 사람이 네가 보는 것을 보고 싶어하겠지만, 때가 되기전에 영원하신 주님을 알고, 그분의 이 세상 생애를 아는 은혜를 받는 것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중에서]
[예리고와 베타바라 사이에 있는 걸어서 건너는 곳에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중에서 부분 발췌 (마리아 발또르따) /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출판허가]
요르단강가.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북쪽 강가에 이르셨을 때는 야영하는 사람들이 모두 천천히 잠을 깨는 중이다. 가까운 예리고에서 가지가지 장사꾼들과 새 순례자들과 요즈음에 경계와 질서유지를 맡은 경비원들과 군인들이 온다. 그들 가운데에는 도둑들과 창녀들도 있다. 창녀들은 뻔뻔스럽게 웃으며, 정숙한 여자들이 그들에게 던지는 형용어에 응수한다. 남자들, 특히 병사들은 웃으며, 그 여자들과 농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강변 모래톱으로 내려가셔서 신발을 벗으시고, 물이 벌써 풀들 있는 곳까지 찰랑거리는 곳으로 걸어가시니, 사도들도 따라간다. 제일 나이 많은 사도들은 “세례자가 여기서 회개를 권했다니!”하고 중얼거린다.
“자네도 봤나?”
“나도 머리에 눈이 있으니, 봤지! 봤어!…”
예수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표정이 없다. 그리고 강변 윗쪽에서 불성실한 남자와 노는계집 사이에 오가는 감탄을 나타내는 말이나 선정적인 대화가 당신께 들려오는 만큼 점점 더 굳은 표정이 된다.
그러나 세속적 쾌락을 쫓는 여자들과 말을 하고 있던 매우 호화로운 옷을 입은 젊은이가 그중 한 여자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가봐, 가봐! 우린 좀 웃고 싶단 말이야. 몸을 바쳐! 저 사람을 위로해 주란 말이야. 저 사람은 가난해서 여자를 살 수도 없기 때문에 침울한 거야.”
예수의 얼굴이 홍조를 띠다가 이내 창백해진다. 그러나 눈길을 돌리지 않으신다. 뻔뻔스러운 여자는 목걸이를 요란스럽게 울리고 옷을 가볍게 휘날리면서, 예수의 발 앞에 쓰러지며, 입으로 떨리는 웃음소리를 내고, 눈과 몸의 선으로는 간접적인 유혹을 하면서 외친다.
“오! 여인의 아들 중에서 아름다운 분! 당신 입의 키스 한 번이면 내 몸 전체를 거저 드리겠습니다!”
요한과 안드레아와 알패오의 유다와 야고보는 분개하고 몹시 놀라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어 어떤 몸짓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가 있던 집단에서 표범 처럼 뛰어나와, 비열한 여자를 덮쳐, 강변에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번쩍 쳐들어 가지고 더 혼을 내주려고 한다.
예수께서 “시몬아! 시몬아!”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시몬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주님께로 돌아오며 말한다. “왜 저 여자를 벌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까?”
“시몬아, 더럽혀진 옷은 벌하지 않고, 빠는 것이다. 저 여자는 옷으로 더럽혀진 육체와 더럽혀진 영혼을 가졌다. 저 여자의 영혼과 육체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자.”
예수께서는 다시 길을 떠나신다. 그리고 이제는 눈길을 돌리신다. 그 부드러운 눈의 시선을 불쌍한 여자에게로 잠시 돌리신다. 하나의 시선, 단 한 번의 눈길! 한 순간, 다만 한 순간! 여자는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베일을 치켜 올려 그것으로 몸을 감싼다. …예수께서는 길을 계속 가신다.
이제 강을 건넜다.
예수께서 명령하신다.
“흩어져서 선생님이 여기 있다고 말하여라.”
많은 군중이 빨리 소식을 듣고 달려온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하기 시작하시는데, 예루살렘에서 병이 들어 의사들에게서 불치의 선고를 받고 집에 가서 죽으려고 급히 집으로 옮겨지는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 가마를 따라가는 눈물의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이용하신다. 그 사람은 부자이고 젊은이이기 때문에 모두가 그 사람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 확실히 죽음은 부유하고 젊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돈으로만 부유하고 나이로만 젊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덕행으로 부유하고 그들의 행실의 깨끗함으로 젊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참다운 현자는 철이 들자마자, 평온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의 행실을 조절합니다. 죽음은 가장 큰 생명에 대한 준비인 것과 같이 삶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참 현자는 삶과 죽음의 진리, 부활하기 위한 죽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순간부터 무익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떼어버리고, 유익한 것으로 풍부해지려고 여러 가지로 힘씁니다. 즉 그를 심판하셔서 완전히 공평하게 상을 주시거나 벌을 주시려고 당신께로 도로 불러 가시는 분 앞에 선행의 짐을 가지고 나타나기 위하여 덕행과 진실한 행위로 자기자신을 풍부하게 하려고 힘씁니다. 참 현자는 지혜로 노인보다도 더 어른스럽게 되게 하고, 청소년보다도 더 젊은 사람이 되게 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것은 덕행과 정의 안에서 살면, 때로는 아주 어린 사람들도 가지지 못하는 감정의 신선함을 마음속에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피곤한 머리를 아버지의 품에 기대고, 아버지께 안겨서 묵상을 하곤 지나가는 구름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 바라고, 아버지를 믿습니다’하고 말하고,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고, 그 다음에는 천국의 광채 속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사랑합니다!’하고 기쁘게 말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으냐 말입니다.
죽음은 거슬리는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공평한 명령입니다. 죽음은 믿지 않고 죄가 많은 사람들에게만 힘드는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에 착하게 살지 않다가 죽어가는 사람의 말로 할 수 없는 고민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사람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았거나 또는 별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고 싶지 않고, 속죄를 하기 위해 아직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야’하고 말하는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 오래 살았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니까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었을 건데’ 하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영혼은 시간이 얼마나 그에게 주어졌는지를 적어도 희미하게는 압니다. 영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자아(自我)를 온전히 행동하는 데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가엾은 영혼입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영혼을 찍어 누르고, 짓밟고, 입을 틀어막습니까! 이런 일은 착한 뜻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이와 반대로 의로운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영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권고를 따르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때로는 인생의 여명(黎明)에 죽어도 나이는 어리지만 공로는 많이 가지고 죽습니다. 그리고 가지가지 형태로 그리고 완전히 너그럽게 실천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그가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백년이나 천년을 더 산다하더라도 벌써 거룩하게 된 것 이상으로 더 거룩하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이를 따지지 않고, 어떻게 살았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시체들을 보고 슬퍼하고, 시체들 위에 눈물을 뿌립니다. 그러나 시체는 울지 않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떨지만, 죽을 때에 떨지 않도록 살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실제적인 시체, 즉 무덤 안에 같이 육체 안에 죽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울지 않고, 슬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육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들이 왜 그들 안에 가지고 있는 시체를 보고는 울지 않습니까? 웃고 농담하고,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는 얼마나 많은 시체를 내가 보는지 모릅니다! 완덕의 꽃장식과 같은 일생을 보낸 다음, 분명히 하느님과 친한 가운데 죽은 아들이나 남편, 형제, 아버지, 친구, 신자, 제자를 어리석게 슬퍼하면서, 악습과 죄로 인하여 죽고, 또 생각을 고치지 않으면 영원히 죽고 영원히 멸망하는 아들이나 남편, 형제, 아버지, 친구, 신자, 제자의 영혼의 시체를 보고는 슬퍼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형제, 아들, 친구, 사제, 그리고 선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보는지 모릅니다! 왜 그들을 다시 살리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큰 사랑입니다. 오! 다시 먼지가 된 먼지에 흘리는 어리석은 눈물! 위선적인 애정! 우시오. 그러나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슬퍼하시오. 그 영혼들을 생명으로 다시 데려오도록 힘쓰시오. 그리고 나는 당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자들에게 특별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지혜가 죽음과 부끄러움의 원인이라고 일러 주는 것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을 잘못 쓰고, 사람에게 수치를 주는 나쁜 행동으로 그것을 더럽혀서 하느님을 모욕하지 마시오. 부모의 백발에 진흙을 끼얹고, 그분들의 마지막 여생에 불붙은 짚단을 던지는 것 같은 행동으로 부모를 모욕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짓밟는 사람에게 저주를 받지 않도록,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모욕하지 마시오.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반대하지 마시오.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반항으로 나라가 크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의 거룩한 행실로 주님의 도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수 있고, 그들의 지위와 목숨까지도 빼앗아 가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다스리는 사람들이 도를 지나칠 때, 또 특히 백성이 거룩하게 되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을 얻을 때, 우리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백성이 거룩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그 이유로, 벌을 받은 사람들을 못 살게 구는 압제를 사라지게 하십니다. 아내에게 불륜의 사랑으로 모욕을 줌으로써 그를 모욕하지 말고, 불륜의 사랑을 알게 함으로써 어린이들의 순진함에 손상을 입히지 마시오. 여러분을 애정으로나 의무로나 그들의 생활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행동하시오. 여러분은 가장 가까운 이웃에 대한 거룩함을 하느님께 대한 거룩함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사랑,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서로서로 싹이 되는 것과 같이 이웃에 대한 거룩함이 하느님에 대한 거룩함의 싹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에 대하여 올바른 사람이 되시오. 우정은 영들의 친척관계입니다. ‘친구들이 함께 걸어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좋은 길을 걸어 갈 때에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정을 가지고 이기주의나 배신, 또는 악습이나 불의를 만들어서 그것을 타락시키거나 배반하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친구의 사업을 알아내서 거기에서 이용하기 위하여 ‘나는 자네를 사랑하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친구의 권리를 가로채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재판관들에 대해서 정직하시오. 모든 심판에 대해서. 위선적인 행동으로 속이지 못하는 하느님이라는 지극히 높으신 심판자에서부터 양심이라는 개인적인 심판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의 눈이라는 다정하고 괴로워하고 친절한 심판들과 백성이라는 엄격한 심판에 이르기까지, 거짓말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증인으로 삼으면서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팔고 살 때에 정직하시오. 팔 때에는 사욕은 여러분에게 ‘돈을 더 벌기 위해 사취해라’하고 말하는데, 양심은 ‘네가 도둑을 맞으면 몹시 싫을 테니까 정직해라’ 하고 말합니다. 남이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을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양심의 목소리를 들으시오. 상품 값으로 여러분이 받는 돈이 가난한 사람의 땀과 눈물로 젖어 있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 돈은 피로의 대가를 치르게 한 것입니다. 그 돈이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치르게 했는지, 그 돈 뒤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 여러분은 모릅니다. ..... 왜 힘세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팔 때는 보복이 무서워서 정직하면서, 힘없고 알지 못하는 형제는 속입니까? 이것은 정직 자체에 대해서보다도 오히려 사랑에 대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저주하십니다. ......
말과 행동에 성실한 것과 같이 눈길에도 성실하시오. 눈길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눈길이나,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거절하는 눈길은 올가미나 단도와 비슷합니다. 창녀의 뻔뻔스러운 눈동자에 얽히고 ‘너 예쁘구나!’하고 말하며, 은근히 유혹하는 그의 눈길에 동의하는 눈길로 응하는 눈길은 목매달아 죽는 사람의 목매는 줄보다도 더 나쁩니다. 가난한 친척이나 곤궁에 빠진 친구에게 거절하는 눈길은 그 불행한 사람들의 심장을 찌르는 단도와도 같습니다. 또 원수를 바라다보는 증오의 시선도, 거지를 바라다보는 업신여기는 눈길도 이와 같습니다. 육체는 원수를 사랑하기를 거부하더라도 영으로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는 영의 사랑이고, 복수를 거부하는 것도 영의 사랑입니다. 거지는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동전 한 닢 던져주고 업신여기며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동냥은 굶주리고 헐벗고 집 없는 육체에나 소용됩니다. 그러나 돈을 주면 웃는 연민, 불행한 사람의 눈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정은 마음의 빵입니다.
사랑하시오! 사랑하시오! 사랑하시오!
십일조(十一祖)와 관습법에 정직하고, 집안에서 정직해서, 하인을 지나치게 혹사하지 말고, 여러분의 집에서 비밀히 지은 죄를 세상 사람이 모르더라도, 알지 못하는 아내에 대한 부정과 하녀에 대한 능욕을 세상이 알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아십니다. 말을 정직하게 하시오. 아들딸들을 교육하는데 성실하시오. ‘네 딸이 너를 읍내의 웃음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행동하여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딸의 영이 죽지 않도록 하시오’ 하고.
그럼 이제는 가보시오. 나도 여러분에게 지혜의 노자를 주고 났으니 떠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를.”
예수께서는 손짓으로 그들에게 강복하시고 빨리 사라지신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중에서 부분 발췌 (마리아 발또르따) /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출판허가]
유의점 : 이 책은 현재 명동성당 서점과 가톨릭회관 서점과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서점 등 가톨릭 관련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특히 이 책에 대한 < 추천의 말씀 >과 < 비오 12세 교황님의 말씀 >과 < 신앙교리성성의 말씀 >은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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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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