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살아납니다.
아담은 첫 번째 인간으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담의 후예입니다.
우리는 카인의 후예이기도 하지만
카인의 후예이기 이전에 아담의 후예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사랑을 놓고 형제와 경쟁하는 인간이기에 앞서
선(善)을 놓고 하느님과 경쟁하고
하느님께 직접 대드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살인자(殺人者) 정도가 아니라 살신자(殺神者)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만이 대담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아담 안에서 신을 끊임없이 살해하는 대담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대담함은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 이름의 뜻이 흙이듯
흙으로 만들어진,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존재,
생기라는 말씀 한 번에 생기었으니 사라지라는 말씀 한 번에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와 같이 흩어지는 존재에 불과한데도
대담하게도 하느님께 대듭니다.
이렇게 하느님 명령에 불순명하고
대드는 아담 안에서는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됩니까?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마지막으로 죽음까지 파멸시키신 다음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체들의 머리로서
모든 지체들을 굴복시키십니다.
모든 지체들의 그릇된
권력과
권능과
심지어 죽음까지 무력화시키심으로
모든 지체들을 당신께 굴복시키십니다.
그럼으로써 아담의 불 순명으로 죽게 된 우리 인간을
순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릇된 권력과 권능과 죽음을 무력화시키고 파멸시키시되
이솝 우화의 바람과 태양의 비유가 잘 말해주듯
강압과 폭력으로 파멸시키지 않고
사랑으로 파멸시키시고 무력화시키십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됩니다.
사랑은 자발적으로 순명케 하고
순명함으로 사랑에 응답하게 합니다.
실상 사랑과 순명은 다른 이름의 같은 것입니다.
사랑이 순명이고 순명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뜻을 순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떠받듭니다.
명령하기 전에 이미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순명하고
순명하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적, 존재적으로 완성합니다.
그래서 살게 합니다.
사랑은 또한 보살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목자가 양떼를 보살피는 그런 사랑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처럼
“몸소 양 떼를 먹이고,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며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폭군은 군림하고 단죄하기 위해 감시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기 위해 보살핍니다.
교만한 판단은 단죄하고 죽음으로 내몰지만
사랑의 판단은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하듯
허약하고 병든 영혼을 정확히 진단하고 살릴 수 있는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살리는데 명수요, 사랑의 왕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 왕께서 오른 쪽의 양과 왼쪽의 염소를 가르신답니다.
그리스도 왕의 백성인 우리는 이 말씀도 거르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형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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