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지막 심판에서 판단 기준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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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8-11-24 | 조회수642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마지막 심판에서 판단 기준 - 윤경재
지난 토요일에 모처럼 본당 교우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주 목적지는 연풍성지와 문경새재 도보순례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께서는 조여 오는 박해를 피해 점점 깊은 산골짝이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그 신앙 공동체를 일일이 찾아다니시러 포졸들의 눈을 피해가며 믿음을 전파하셨던 사제들이 계셨습니다. 그중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는 문경새재를 열두 해나 넘나들며 고난의 복음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다가 길고 긴 여정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과로로 쓰러져 선종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나라 첫 번째 사제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님을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님을 ‘땀의 순교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문경새재는 조령이라고도 부르는데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 땅을 연결하는 관문입니다. 영남의 물자와 사람들이 한양에 왕래하려면 반듯이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고 전쟁이 나면 한바탕 전화가 휩쓸고 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새재는 여러 번 전화에 시달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새재 고갯마루에 이르는 길에는 세 개의 관문이 자리 잡고 서 있습니다. 이 세 관문은 전쟁을 방비하기도 하고 도적 떼를 감시하기도 하며 불순한 자를 검거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박해를 피해 달아나는 교우들과 전교 여행을 다니는 신부님들에게는 명줄을 죄는 오랏줄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려고 포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시체나 쓰레기를 버리는 수구문을 통해 들락날락하였다고 전합니다. 제1관문에서 제2관문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예배동굴’이라는 안내판이 있어 찾아 올랐습니다. 새로 난 길에서는 70여 미터 산을 타고 올라가야하지만, 옛 길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을 것입니다. 낙엽이 싸여 미끄럽고 길도 보이지 않았지만, 최양업 신부님께서 고난의 여정 중에 그 동굴에서 기도도 드리고 미사도 올린 곳이라 하니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굴에 다다른 우리 일행은 모두 놀랐습니다. 간신히 무릎을 꿇어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깊이는 5-6 미터 가량이며 폭도 제법 넓어 여남은 사람이 함께 기도드릴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동굴 제일 깊은 곳에 제대 같이 가로로 길쭉한 돌이 층계지어 있었습니다. 그 돌 제대 앞면에 십자가가 새겨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신앙의 선조가 새긴 십자가라 여겨집니다. 이 십자가를 향해 기도드리고 제물도 봉헌하며 미사도 거행했을 것입니다. 우리 일행은 저절로 무릎 꿇고 묵상과 기도문을 흠송했습니다. 비록 성체를 모신 감실은 없었지만, 최양업 신부님께서 숫한 어려움 가운데 미사를 이곳에서 거행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여느 경당보다 더 감회가 깊었습니다. 오전에 연풍 성지에서 미사 드릴 때 성지주임 신부님께서 강론하신 내용과 성지 설명이 더욱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박해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도 매번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박해는 사회가 자기편이 아니라고 따돌리고 제 편을 들지 않으면 불이익이 생길 것이라 위협하는 것이며, 또 우리 자신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좁은 길을 선택하기보다 남들이 가는 넓은 길을 택하라고 꼬이는 악마의 소리도 박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갈등과 어려움은 언제나 있는 것이라 말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 가르기를 하는데 자기편에 들라고 온갖 감언으로 회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은 언제나 역설처럼 들리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0-22) 우리가 이런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가 보여주신 행적으로 증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죄수를 포졸들이 공개적으로 압송하고 공개 처형했는데 그때 우리 순교자들께서 보여주신 의연한 행동과 태도에 감화되어 많은 사람이 숨어서라도 신앙을 지키려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뿌리 뽑으려했던 것이 오히려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연풍성지는 옛날 향청이 있던 곳으로 왜정시대엔 지서로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우연히 연풍 공소를 세우려 이 터를 사들이고 연못을 파다가 박해 때 죄인을 죽이던 형구돌과 철 수갑을 발견하여 이곳이 성지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 103위 성인을 시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힘차고 끈질기게 맥동치는 것이 바로 복음 말씀이 살아 있는 진리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었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연중 마지막 주일입니다. 독서와 복음 내용도 우리가 선택한 것에 대해 마지막 날 심판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우리가 생각하는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우리 편에 있었다고 안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무시하고 소홀히 여긴 사람도 잊지 않고 거두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보잘것없다고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을 더 챙겨주라는 비유 말씀입니다. 그리고 비록 사회에서 소외당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마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복음 말씀의 핵심도 마지막 심판에서 우리가 이승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거나 어느 편에 속했는가가 판단 기준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얼마나 작은이들과 함께 나누었는지 그리고 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았는지가 관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는 순교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씀대로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애쓰셨기에 더 복음의 생활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박해가 사라진 이 때 우리가 선조의 믿음을 본받는 길은 더욱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애쓰는 일일 것입니다. 연풍성지 순례를 통해, 어려운 복음 말씀을 더 깊게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신 오동영 주임신부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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