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갈망, 욕망 그리고 하느님 얼굴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25 조회수523 추천수1 반대(0) 신고
누구나 마음 속 깊이 무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불치(不治)의 불안감, 그리움, 욕망을 가졌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워할까? 우리들의 이 쉬지 못하는 정열을 무엇으로 잠재울 수 있을까?
 
 안네 프랭크는 그의 일기에서 정확하게 이러한 궁금증을 토로하고 있다.
“오늘은 화창하여 하늘은 무척 푸르고 사랑스럽게 미풍이 불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갈망한다. 자유를 부르짖고 혼자 있는 친구에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정말 울고 싶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차라리 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울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여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다니며 닫힌 창문의 틈을 통하여 숨쉬며
내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마치 내가 ‘결국 하느님 당신은 나의 갈망을 만족시키지를 못하는군요.’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안에 샘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샘이 깨어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내 온 몸과 영혼으로 느낀다.
정상적으로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지금 너무 혼돈 상태에 있다.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며
오로지 내가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만 안다.
 
누구든 이러한 의문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서를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왜 이런 불안감 때문에 안타까워할까?
 
노벨상 수상작가인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1919- )의
5부작 『폭력의 아이들(Children of Vio;ence)』에서 1부에 해당하는
『마사 퀘스트(Martha Quest)』는 주인공 마사 퀘스트가 하이틴이라 할 수 있는
십대 후반 시절에 경험하는 일들의 성장 기록이다.
사회생활도, 몇몇 남성들과의 육체 관계도, 종내에는 결혼까지도 경험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자아 과잉의 공상에 곧잘 빠지고,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신경 쓰며,
별다른 노력 없이 대가를 바라고, 무기력해질 때는 부모와 남자에게 기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책을 읽어 지성을 쌓고, 좋은 멘토이자 친구를 만나 자극을 받으며,
경험의 시행착오 반복으로 자아 실현의 길을 찾고
그것을 통해 세상에 대한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그녀가 남다를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세상과 자신에 반문하고 회의하며
돌파구를 찾으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관습적이고 타성적인 것에 반기를 들고, 가식과 허영, 인간차별을 경계하며,
자아보다는 타인을 위하여 가는 길,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정한 [어른] 이 되어가는 길이었다.
철듦은 “깨달음”이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사 퀘스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문인
“우리들은 도대체 정열을 어디에 쏟아 붓고 있는가?에 답하려고 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우리 내부에 있는 수천 볼트의 에너지를 가진
맹목적인 에로틱한 에너지로만 이해하였다.
우리들은 정열을 선택에 따라 창조, 사랑, 섹스, 증오, 순교, 권태에 쏟을 수 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들의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다독거릴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인간의 불안감에 대한 해답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하여 생기는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달래려고 하는 여정(旅程)이다.
이러한 마음을 성 아우구스띠노는 가장 잘 표현하였다.
“주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들었나이다.
우리는 오직 당신 안에서만 쉴 수 있나이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었지만
신자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유대인 성경에 오래 전부터 있었다.
모세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질문했던 것이다. “누가 감히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려고 산에 올라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를 간청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기 33:20)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를 원한다는 것은
실제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더할 수 없는 평화를 얻을 수가 있다.
이를 시편(42:2-3)에서는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평화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영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아직도 하느님과 대면하려고 한다. “택도 없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오 5:8)
이 한 말씀이 영적 여정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게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영성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또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리스 레싱의 여주인공 마사(성경에 나오는 마르타를 희화, 속에서 사는 평범한 인간)처럼
해소하지 못하는 정열 때문에 달떠있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 정열을 창조, 사랑, 섹스, 증오, 순교, 게으름 어디에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 성공, 포용, 직업, 가정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하였다. 어디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는가?
우리들 내부에 있는 탐욕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새 사람이 되고 난 후
그 동안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쓰레기였음을 고백하였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피 3:8)
(롤하이저 신부님의 칼럼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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