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하지 않는가? | |||
---|---|---|---|---|
작성자유웅열 | 작성일2008-11-26 | 조회수55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는가?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현재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의 외모를 비롯해, 정신 및 영혼의 상태 그리고 주위 환경 등에 대해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신앙인들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 좀 더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빛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거룩한 독서, 묵상, 향심기도, 나아가 깊은 관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려고 노력한다.
바오로 사도는 10 여 년 동안 자신을 온전히 변형시킨 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도들 가운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1코린 15,9) 사도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자랑은 않고, 늘 하느님 자랑만 한다.”(로마 3, 27)
바오로 사도는 우선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 외양형태가 변했다. 그리고 정신의 상태, 마음의 상태가 모두 변했다. 행동 따로, 정신 따로, 마음 따로 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겉으로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취하지만 정작 정신과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정신은 맑게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마음과 영혼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한 경우도 많다. 따로따로 논다.
우리가 목표하고 있는 영성적 삶은 바로 행동, 정신, 마음(영혼)이 하나의 통합 구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내가 누군지는 알고 죽어야 하지 않는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입으로는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정밀하게 나 자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건강할 수 있고, 이웃을 위한 삶을, 하느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대충대충 막 살지 않는다. 자신이 왜 존재하고, 왜 태어났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외양과 교류, 핵심형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하느님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이 부활에 대한 응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응답은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실제적 상황 속에서 발생해야 한다.
부활에 대한 응답은 어느 길에서나, 언제든지 항상, 모든 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영원한 생명은 그 어떤 허황된,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이것은 매일의 삶 안에서 어떻게 인간으로서 바른 삶을 살아가는가의 문제다. 정 영 식 신부 지음. 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오늘의 묵상: “하느님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초대하신다. 이 부활에 대한 응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응답은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실제적 상황 속에서 발생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처럼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이런 글을 읽고, 오늘의 삶이 마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처럼 내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신비함을 느낍니다.
건강을 주셨기에 일어날 수 있었고, 또한 사명을 주셨기에 묵상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제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 기도로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셨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
제 자신이 스스로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이 세상에서 숨을 쉬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저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을 글로 표현하는 묵상 서를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처음부터 이런 글을 쓰려고 내가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글을 읽다 보니 머릿속에 스쳐가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떠오르면서 나의 손놀림으로 컴의 좌판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시인의 글이 떠올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글을 씁니다. 나는 수를 놓습니다. 그것이 마치 내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 정 슬 시인은 뇌성 마비자입니다. 기쁨을 표시하려면 온몸을 흔들어야 합니다. 그런 시인이 글자 하나를 생각하고 쓸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마더 데라사 수녀님의 글에서 “나는 주님의 몽땅 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 것을 모르듯,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들, 세계적인 문학의 대가들, 언변가들, 우리나라에도 손꼽히는 작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쓰는 작품들이 그분들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생각들이 과연 스스로의 생각인지 아니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한번 쯤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능을 누가 주셨습니까?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이 하시고 계시지만, 주님은 정작 아무런 말씀도 하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신앙을 우리도 따라 하게 하소서! “나는 사도들 가운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1코린 15,9) 사도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자랑은 않고, 늘 하느님 자랑만 한다.”(로마 3, 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