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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과 복음 묵상 - 순결한 창녀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30 조회수813 추천수8 반대(0) 신고

 

 

 

                                  대림 1 주일 - 순결한 창녀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가정 먼저 정복해야 했던 도시가 예리고였습니다. 예리고는 워낙 난공불락의 성이라 감히 쳐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 두 명의 정탐꾼은 라합이라는 창녀의 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라합만이 여호수아가 보낸 파견자들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신약에서 ‘예수’와 같은 이름이고 ‘해방자’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합이라는 창녀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사람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옛 교부들은 하나같이 라합을 ‘교회’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한 때는 다 이방의 신들에게 몸을 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너는 속옷을 벗어 알몸을 드러내었고 내 눈에 역겨운 우상을 몸 바쳐 정부들과 놀아났으며 자식들의 피를 우상들에게 바쳤다.” (에제 16,36)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신부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섬기면 성경에서는 매번 ‘간음’이나 ‘매춘’으로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라합은 죄의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 모두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속여서 그들을 구해주고 탈출시켜주며 예리고를 함락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여호수아는 라합의 약속대로 그녀와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려줍니다.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시작되는 첫 대림주일이기도 하면서 전례력으로 새 해의 첫 날입니다. 며칠 전까지도 계속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복음이 나오더니 새해 시작 하는 날부터 또 다시 깨어있으란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깨어있음이 영성의 시작과 끝인가 봅니다.

창녀 라합은 죄 속에서 살았지만 구원이 오는 때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과 가족들도 모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예리고의 한 창녀를 선택했고 그 창녀는 무엇을 했기에 그런 선택을 받게 된 것일까요?

창녀는 죄인 중에 죄인이고 하느님은 그 죄인을 택하셔서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라합은 사실 정말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니고 예리고에서 ‘스스로 가장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가장 낮고 비천한 곳을 찾아 머무십니다. 태어나시자마자 여물통에 뉘이셨고 커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사람이 당신이라 하시고 마지막 순간도 태어나실 때와 마찬가지로 나무 위해서 싸늘히 식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당신 안에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자신을 비천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루카 1,46-49)

성모님만큼 깨끗한 사람이 없었는데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비천함을 보시고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다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어 주신 영혼을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는 성서 말씀이 공연한 말씀인 줄 압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신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 4,5-6)

 

하느님은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되 겸손한 영혼을 더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비천하고 큰 죄인이라고 보는 것은 주님을 모시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을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면 좀 위선적인 것같이 들릴 수 있지만 그들은 정말 그렇게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빛에 가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가까이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영혼이 더러움을 더 크게 느낍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멀리 있을수록 ‘내가 잘못하는 게 뭐가 있어?’라고 하며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만족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은 그분이 들어 올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기도가 아니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는 마음을 들어 올려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고도 자신의 비천함을 더 느끼고 더 겸손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는 잘못한 것입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항상 기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하느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대답 대신 "태양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 인간인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는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다면 제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도 소용없겠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를 때 자네로 하여금 깨어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그 분을 모시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꾸준한 기도로 내 안에 그 분의 자리를 마련해 놓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순결한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교부들이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해오던 말이었습니다.

(신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나 비록 검지만 케달의 천막처럼, 실마에 두른 휘장처럼 아름답다.” (아가 1,5)

우리들은 비록 죄로 검어졌지만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야만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교회도 모두 검은 죄와 영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순결한 창녀’입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여기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없습니다. 스스로 순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창녀처럼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겼음을 고백할 때만이 순결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회개하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결한 처녀와 혼인하여 한 몸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겸손하고 가장 깨끗하신 성모님을 택하시어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대림이고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들, 이번 주도 깨어있으란 말을 듣습니다. 깨어있으란 말은 본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나의 비참한 처지를 보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빛으로 내 자신을 보아야 내 자신이 주님을 모시기에 얼마나 부당한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그 부당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순결한 성체를 모시면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호세아가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호세 1,2-3 참조) 그녀를 순결하게 한 것처럼 죄인들인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를 더 순결하게 하시기 위해 더러움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비천함을 확실히 깨닫고 깨끗해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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