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차이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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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08-12-07 | 조회수670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차이 - 윤경재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1-8)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기 전에 이미 침례운동이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런 운동단체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주 예수는 자기네 파에서 갈려나간 제자라고 그리스도 초기공동체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와 역사, p99 이하 참조) 예민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네 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에 시빗거리가 되었으며 다시는 거론되지 않을 만큼 정확한 차이를 천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라는 차이를 두어 설명하였습니다. 비록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기는 했지만, 질의 차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를 요사이 신앙인들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이 세 가지 측면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육의 차원, 마음의 차원, 영의 차원입니다. 이 세 차원은 서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안에서 온전히 혼융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면은 사뭇 다릅니다. 그런데 현대의 우리는 인간을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분법으로 갈라 생각하는 그리스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영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고 영도 정신의 한 부분인 것처럼 받아들일 위험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크리스천 중에서도 이것을 혼동하여 사용하는 때가 자주 나타납니다. 그러니 일반인에게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특히 과학자들이나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렇게 여기고 자기의 의견을 말이나 글로 표현합니다. 그런 표현을 자주 들으면 크리스천이라도 헷갈리게 마련입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라도 제대로 분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은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주신 신적 능력의 차원입니다. 엄연히 정신과 다른 차원입니다. 물론 정신도 피조물이 갖춘 능력이지만, 정신은 육신이 외부와 맞닥뜨릴 때 반응하고 생각하며 판단하고 意志하고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이에 비해 영은 자신이 하느님의 양자라는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을 불어 넣어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새로 영의 능력을 받아야만 우리가 한 형제이며 하느님과 내가 아빠와 자식의 관계라고 알게 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내려왔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세례받으시기 전부터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이 명백한 사실을 볼 줄 알았기에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고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이를 영적으로 설명합니다. “나는 (나 또는 ~ )이다.”라고 항상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비교해서 “나는 아니다.”라는 천명을 1장 19-22절에서 세 번이나 요한의 입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이다와 아니다”의 차이가 바로 영이신 예수님과 보통 사람인 요한과의 차이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자 요한이 말한 회개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에는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잘못 살았다는 정신적인 깨달음 수준에서 머물 것이냐 아니면 이제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영적 방향전환이냐 하는 차이입니다. 이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라는 깨달음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쉬움 같은 것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영의 사람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상대가 어떤 종교를 내세우더라도 다 받아들였고 천주교를 고백하라는 요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영으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정신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사고하기에 어떤 주장을 내세우게 되고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능력이 모자라기에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 들고 설득하려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보여주셨습니다. 말씀과 행동에 힘이 있으셨습니다.(루카 24,19) 정신적 깨달음만을 얻은 분들이 다가가기에 불가능한 성령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림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 회개하여 성령이신 주님을 영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도 정신적 회개가 아닌 영의 방향전환이라야만 합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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