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물개 신부' 의 질투심 - 주상배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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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8-12-17 | 조회수989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물개 신부' 의 질투심 군종신부 10년을 마치고 처음 본당을 맡게 되었을 때, 흥분과 궁금증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윤곽만이라도 알고 싶어 주소록을 펴보니 많은 신자와 유치원, 그리고 수녀님이 세 분이나 되었다.
기분이 들떴다. 부임하여 본당 신자로 부터 첫 번째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 대답할까.. 주임 신부라고 할까.. 본당 신부라고 할까..)
망설이다가 주임 신부라고 대답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 전화가 왔을 때는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예, 본당 신부입니다."
수화기를 놓고서 (아, 이제 내가 본당 신부로구나, 본당신부! 예, 본당 신부입니다.) 하고 몇 번이고 되뇌어 보면서 만족 해 했다.
나에게 맡겨진 우리 신자들에게 빨려들듯 마음이 기울어졌다.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특히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강론을 준비했다. 그러나 강론 분위기는 왠지 흡수되지 않고 허공을 떠도는 느낌이 들었다.
군에 있을 때 책을 많이 읽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표현력의 부족 때문일까?
강론시간은 짧은데도 그 시간에 신자들은 주보를 읽기에 바빴고... 지루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래도 교우들은 나를 사랑했고 나 또한 교우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피정의 기회를 가져, 내가 전해 주지 못하는 뜨거움을 다른 신부님을 통해서 전해 주기로 결정하고 수녀님들에게 어느 신부님이 피정 강론을 잘 하시는지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신부되신 지 일 년 밖에 안 되는 젊은 수도회 신부님을 모시자고들 한다. 그 분은 마침 우리 본당 출신이고 부모님도 우리 본당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신자들도 잘 알고 있는 터라 쾌히 모시기로 했다.
피정의 날이 되어 그 신부님이 강론을 하시는데 서너 시간이나 말씀을 하셔도 한 사람도 졸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까르르 웃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닦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연 사흘 동안이나 했는 대도. 며칠 더 연장해 달라느니 다음에 또 모시자 느니 야단들이었다.
나는 이상야릇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등감과 질투심 이었다!
더구나 강론을 마치고 나오시는 그 젊은 애숭이 신부님에게 남녀노소를 불문 하고 우르르 몰려가,
바로 옆에 서 있는 자기들의 본당 신부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그 신부님 손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신부님이 피곤하실 테고 또 시원한 맥주라도 대접 하겠다' 며 양해를 얻고 교우들로 부터 떼어내다 시피 하여 방으로 모셨다.
그랬더니.. 청하지도 않은 우리 수녀님들이 들어오시면서 오늘의 강론을 칭양하는 것이 아닌가!
(수녀님들조차 이렇게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시다니... 아니야, 그게 아닐 테지..., 수녀님들이 나를 성인같이 믿고 그 젊은 신부님을 격려하시는 것이겠지.. 앞으로 다신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아니야! 다시 모시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야...)
이렇게 마음속에서는 악마와 천사의 싸움에서 천사가 이기는 듯 했으나 내 입술은 여전히 비뚤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피정 준비를 하면서.. 신자들이 이번 피정을 만족하게 여긴다면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본당 신부님이 주선을 잘하셨기 때문이라는... 칭찬의 말을 듣게 될 것을 은근히 바랐던 것이었다.
질투는 여성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나도 별 수 없는 부족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했다.
이러한 느낌을 체험한 후로는 고백자들로부터 질투에 대한 고백을 들을 때 전과는 달리 큰 보속을 주게 되었다.
카인의 질투가 동생 아벨을 죽였듯이 질투는 살인까지도 저지르고 영원한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질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주상배 안드레아 광장동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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