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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41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17 조회수657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대림 제3주간 수요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7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7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최근 20여일 시차를 두고 장인 어르신과 어머님께서 연 이어 아빠 하느님의 품으로 귀천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90세를 넘게 천수를 누리시며 건강하게 생활하시다가 귀천하셨으므로 그나마 위안 삼고 있지만 그래도 애통한 마음을 떨칠수 없는 것은 자식 된 마음인 듯 합니다. 두 분의 장례를 치루며 새삼 느낀 점은 조상에 대한 禮와 우상조차 구분 못하는 일부 우리 그리스도교의 편협된 시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복음입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예수님의 조상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최근의 연 이은 장례를 치른 오늘 제 입장에서는 조상과 우상을 구분하라는 교훈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저의 집안은 열린 종교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머님의 빈소에 신부님, 목사님, 스님이 오셔서 어머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연도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극락 왕생을 위해 독경해 주셨습니다. 종교가 각기 다름에도 가족 간에 종교적 문제로 아무런 마찰도 없었으며 저희 가족 모두는 제 어머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신 각 종교의 성직자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장인 어르신의 장례는 종교적 문제로 불화가 조금 있었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집안의 애사는 합심하고 서로 위로하여야 함에도 종교적 문제로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긴다면 이런 종교 생활은 원점에서 다시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갈등은 우상 숭배를 잘못 이해하는데서 비롯되고 있었으며 우리 천주교는 우리 민족의 전래의 예절을 수용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고인이 되신 부모에게 절을 하는 것조차도 우상 숭배로 생각하며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성균관대를 설립하신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심산 상을 수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심산 상을 수상하는 사람은 유교의 고유 의복을 갖추고 심산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관례를 따라야 하므로 추기경님께서는 심산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가서 정중하게 절을 올렸고 이런 모습은 예와 우상 숭배는 다름을 보여주신 모습으로 지금까지 깊은 감동으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십계명과 개신교의 십계명은 첫 계명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첫 계명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지만 개신교의 십계명은 이를 둘로 구분하여 '①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 우상을 섬기지 말라.' 로 나눠져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십계명을 잘못 이해하여 조상에게 절을 하며 예를 드리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착각한 듯 합니다.

물론 과도한 허례허식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조상에게 절을 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잘못 이해한 처사이며. 우상 숭배는 참된 진리를 따르지 않고 거짓과 욕망을 따르는 우리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참된 진리가 아닌 잘못된 가치관을 따르는 우상 숭배와 민족 전래의 예절과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박해사를 공부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중 하나는 박해를 받게 된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전라도 어느 지역에서 조상의 신주를 불 지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께서는 '상재상서'에서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였지만 당시로서는 받아 드리기 어려운 주장을 하신 듯 합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신주를 부인하는 것은 종묘사직을 부인하는 중차대한 문제로 비화 될 수 있고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와 관련된 상제상서의 마지막 부분을 발췌 하였습니다)
쌀과 수수와 기장과 피와 향기로운 과일로 된 잿상을 차려 놓음이 헛된 일이 아니면 거짓된 일입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헛되고 거짓된 예로 어찌 이미 죽은 어버이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양반 집의 신주라고 하는 것도 천주교에서는 금하는 것입니다. 이미 정신의 기백과 육체의 골격이 서로 연결된 것이 없고, 또 낳아서 길러준 노고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아비라 어미라 함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목수가 만들 것이요, 분을 칠하고 먹을 찍은 것을 가지고 참 아비와 참 어미라 부릅니까? 바른 이체에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지 아니합니다. 차라리 양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얻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 가톨릭은 조상의 제사에 대하여는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당시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다가 순교하신 분들을 기리며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교리를 그대로 믿으며 순교하였는데 그 교리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하는 가를 묵상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서 영원불변의 하느님의 소리는 어떤 것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소리는 어떤 것인가'를 분별하여야 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살으셨기에 진리의 하느님과 일체를 이루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도 부족하여 굳이 이렇게 복음서에 세속의 족보를 나열할 필요가 있는가를 묵상해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공자님은 정상적인 결혼에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는 뜻에서 야합(野合)에 의해 태어나신 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자님이 어떻게 태어났던 그 자체를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도덕한 야합으로 태어나셨기에 예를 중시한 인물이 되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을 극복하고 온 인류에게 위대한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을 본 받아서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만 인류가 구원받는 길 임을 자각토록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되어야 함을 더불어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화려한 족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보다는 구유에서 태어나신 의미를 묵상해야 하는 성탄을 앞두고 있음으로 오늘 복음인 예수님의 족보에 대하여는 오늘 묵상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셔서 위대한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더 우러나고 있습니다.

고려 때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 하였습니다. 12세기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이 땅의 노비인 만적은 '사람아래 사람 없고 사람위에 사람 없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왕후장상의 씨'에 동의하지 못하여 이를 묵상하지 못하므로 저도 어쩔 수 없는 만적의 후예인가 봅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묵상하며 오늘 복음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으나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복음서의 조상을 순서대로 배열해 봤던 지난 자료를 지금 다시 확인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41대 이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57대 이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28대 이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43대 이며, 두 복음서에서 그나마 조상의 배열이 맞는 경우는 불과 몇 몇 조상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서를 비교하다 보면 이처럼 서로 다른 여러 사실에 대하여 많은 혼란을 느꼈지만 지금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을 겪었던 주 원인은 성경은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연연한 탓에 혼란을 격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묵상을 이제 마무리하며 아쉬운 점은 두 분을 아빠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보낸 후 첫 시작하는 묵상 글이어서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묵상하고 싶어집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의 선함은 무엇이고 악함은 무엇인가? (집회 18. 8) 하는 금언들이 화두처럼 뇌리에서 자꾸 맴돌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고뇌하는 삶이며 이런 고뇌를 통하여 주님께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고 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습니다. 이런 제 독백을 언제나 묵묵히 들어 주시며 새로운 가르침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신부님께 늘 존경과 함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의 한 쪽 기둥이신 서 공석 신부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은혜에도 두 손 모아 감사 드립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아빠 하느님의 아드님에게도 세속의 족보가 필요한 세상인 듯 합니다.
이런 족보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빠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성령님의 지혜로 이 땅을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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