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2008.12.17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창세49,1-2.8-10 마태1,1-17
"대 긍정의 하느님"
하느님은 대 긍정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다음 두 구절로 압축됩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와
“잘 될 것이다. 잘 될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으로 시작해서 주님으로 끝나는 역사요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족보 역시
아브라함의 대 긍정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 긍정으로 끝납니다.
부분의 과정만 볼 때는 때로 절망이겠지만
처음과 끝을 조망해 볼 때는 낙관적이요 긍정적일 수뿐이 없습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만 남습니다.
오늘 새벽 성무일도 시
이사야 독서 중 다음 대목도 마음에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내가 하느님이다.
누가 또 있느냐?
빛을 만든 것도 나요, 어둠을 지은 것도 나다.
행복을 주는 것도 나요, 불행을 조장하는 것도 나다.
이 모든 일을 나 하느님이 하였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아주 예전에 읽은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런 믿음이 우리를 대 긍정의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오늘 예수님의 족보에도
하느님의 대 긍정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째, 무한히 기다리며 인내하는 하느님이십니다.
대 긍정의 사람 역시 기다림과 인내의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서두르지 않고 길고도 지루한 절차를 밟아 가십니다.
뿌리 없이는 꽃도 없습니다.
긴 인내의 족보의 뿌리에서
마침내 활짝 꽃으로 피어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창세기에서 야곱의 유다를 통한 축복이
메시아 탄생으로 그 예언이 실현됨을 봅니다.
사람의 경우든 자연의 경우든,
인내의 기다림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때가 되면 하느님은 그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니 조급한 마음에 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게 믿음입니다.
둘째, 무엇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를 당신 구원 경륜의 도구로 활용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대 긍정의 사람들 역시
모두를 포용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사람들 눈에 쓸모 없는 사람이나 사물들이지,
하느님 눈에는 다 쓸모 있는 사람들이자 사물들입니다.
돌담을 쌓는 데 크고 잘 생긴 돌만 필요한 게 아니라
이런 크기 저런 크기, 이런 모양 저런 모양 다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나무로 집을 지을 때 역시
이런 나무 저런 나무 다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이래야 다양성의 아름다운 조화요
모두가 자기 존재에 자부심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족보를 보십시오,
유명한 사람들 보다는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쓸모없는 사람들 같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긴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 돌들처럼
한 몫을 하는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특히 우리의 윤리의식으로 볼 때,
구약의 다말, 라합, 룻, 바쎄바, 다 불륜으로 아이를 낳은
별 수 없는 이방 여인들이요
우리의 성모 마리아 역시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매사 짧은 생각으로 경솔히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이나 뜻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 과정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감동의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족보뿐 아니라
우리의 족보도 묵상하며 참 재미있을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5000년의 역사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족보의 뿌리를 캐고 올라가면
마지막에는 역시 하느님께 닿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성사로 예수님의 족보에 편입되게 되었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 우리들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영적족보를 확인하는 시간이자
대 긍정의 사람들로 거듭 새로 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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