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적 자아의 흡수 <와> 신적 본성의 참여 [신앙교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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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이수 | 작성일2008-12-17 | 조회수66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그리스도교 명상 그리스도교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로마에서, 신앙교리성으로부터 < 간략 소개 > 이 지침들은 일차적으로 주교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지역 교회들을 염려하는 사목 정신을 지닌 주교들은 하느님의 온 백성-신부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이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지도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동안 많은 신앙인들은 비그리스도교적 명상 방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하기 위해 그러한 방법들에 관심을 쏟는다. 또한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되면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기도 방법들 안에서 내적 평화와 심리적 균형을 이루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학적 측면을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심오한 본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명백한 전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적 기도를 결정짓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느님과 피조물에 대한 진리 자체를 밝혀 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조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정확히 말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심오한 대화이다. 따라서 그것은 속량된 피조물이 거룩한 성삼위의 심오한 생명과 이루는 일치를 드러낸다. 세례성사와 교회 생활의 원천이고 절정인 성체성사 위에 바탕을 둔 이 일치는 회개의 자세 곧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전향의 태도를 뜻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진정으로 개인적이며 공동체적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일종의 습성을 이룰 수 있는 자아 집중 또는 비인격적인 기교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초월적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자유로이 개방시키지 못하는 영적 개인주의 안에 틀어박혀 기도하게 만드는 경향을 탈피하는 것이다. 성서 자체가 성서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놀라운 행위들을 기도 중에 회상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거듭 자신들 가운데서 실현되고 있음을 자각한다. 성서의 계시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온 창조계와 모든 인간의 운명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구원 업적에 비추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찬양을 받으신다. 신약성서 안에서는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수난과 부활에 힘입어 그분 안에서 당신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신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가 이루어졌음을 시인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 사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계시하는 하느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시는’ (1고린 2,10)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 안에 오시어 그들이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루 다 가르쳐 주지 못했던 모든 것을 온전히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요한 16,13 이하)''''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단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그분 자신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15)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밝아진 안목에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계시를 온전히 인식하여 언제나 그 계시에 대하여 말하였다. 공관 복음서는 부활 이후에 얻게 된 더 깊은 이해와, 제자들이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들을 이야기한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에페 3,18-19). 하느님의 신비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 (골로 2,3) ‘어떠한 궤변에도 넘어가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기’ (골로 2,4)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와 기도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시와 은총의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선물을 향해 모아진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이 신자들의 모임 안에서 그리고 은총의 도움을 받고 있는 각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행업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흠숭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바로 이런 까닭에 교회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원천으로서 하느님 말씀의 봉독을 권장하고 아울러 모든 신자가 기도를 통하여 성서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성서를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움직임 안에 잠겨 들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근본 내용은 마땅히 그러한 움직임의 이중 방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성령 안에서 성자께서는 당신 행위와 수난을 통하여 성부께 세상을 화해시키러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반면에 이러한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 그리고 같은 성령 안에서 강생하신 성자께서 당신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성부의 뜻을 실현하심으로써 성부께 복귀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이 같은 움직임의 일치를 명백히 보여 준다. 이 기도에 따르면 천상 예루살렘 안에서 새로운 땅이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 용서와 보호를 위한 간청들은 우리를 위한 아버지 뜻의 근본 차원들을 명확히 드러낸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는 교회 자신의 기도가 되었다. 교회 역사의 초세기 때에도 일부 그릇된 기도 방식이 교회 안에 스며들었다. 몇몇 신약 성서 본문들이 벌써 그러한 기도 방식들을 시사한다. 두 가지 중대한 탈선이 확인되었는데 거짓 영지주의와 메살리아니즘이 교회 교부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늘날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부들의 반응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체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은 많다. 오류들을 대적하면서 교부들은 사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성령 안에 항상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은총은 영혼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비추심 또는 초월적 인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피상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교부들에게 기도의 결실인 초월적 인식의 진정한 표지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완전성은 신적인 것에 대한 체험과 관련되어 평가될 수도 없다. 교부들은 영혼이 기도 중에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가 신비로운 방식으로써 그리고 특히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더구나 그 일치는 역경이나 고독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오히려 그것들은 영성의 대가들이 항상 분명히 시인해 온 바와 같이 언제나 기도의 모델이며 중개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버림받은 상태에 진정 동참하는 것일 수 있다. 오류는 한결같이 죄인인 인간에게 유혹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무한한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인 양 그 간격을 시험하고 극복하도록 자극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상에서 취하신 방법을 이제는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하게 하며, 순수한 은총으로 여겨져 왔던 것을 ‘초월적 인식’ 으로 간주하면서 자연 심리학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도록 유도한다. 이런 그릇된 유형들은 역사 안에서 줄기차게 등장해 왔으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종종 매혹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일종의 해결 방도로 즉, 하느님을 신속하게 발견하는 방도로 그리스도인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이런 유형의 오류들은 어느 곳에서 발생되든 간에 그 특징이 아주 간단하게 밝혀질 수 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 안에서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업적들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깊이를 명상을 통해 파악하려고 애쓴다. 신적인 것의 영역을 향해 상승하려는 시도 또는 그 영역 안으로 잠겨 들려는 시도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각종 위험과 오류들로부터 벗어나지 아니한 시도 곧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비그리스도교적 명상과 혼동하는 시도의 움직임이 현저히 거세게 일고 있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같은 방향에서 어떤 사람들은 동양의 방법들을 오로지 그리스도교적인 묵상을 위한 심리적 준비 단계로 활용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특정 가톨릭 신비가들의 저서들 안에 묘사되어 있는 경험들과 유사한 영적 체험들을 겪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동양의 명상법과 조화시키려는 그와 유사한 방안들은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언제나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고유한 방법들과 내용들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기도의 올바른 ‘길’을 발견하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과 관련하여 이미 논의되어 온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양식’은 그분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 (요한 4,34)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심오하고 친숙한 일치를 이루신 가장 완전한 방법은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끊임없는 예수님의 심오한 기도로 표현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만 아버지와 가장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분의 양식이라고 해서 그분께서 아버지께 자신을 일치시키시고 또 이 세상 안에서의 사명을 위한 새로운 힘을 아버지에게서 얻으시기 위하여 지상 생활 동안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시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셨다. 그분께서 아버지와 이루고 계신 일치로 영광스럽게 되신 타볼 산 위에서 그분께서는 자기 수난을 상기하셨으며 (루가 9,31 참조) 또한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 위에 ‘세 초막’을 지어 그 곳에 머물고자 하는 의도를 전혀 갖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교적 관상 기도는 언제나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며 또한 분명히 이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가깝게 이끈다.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신비를 희랍 교부들은 인간의 신화 (神化)라고 불렀는데 그 신비에 가까이 나아가고 또 이를 실현하는 방법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우선 인간이 근본적으로 피조물이며 영원히 피조물로 존속하므로 인간의 자아가 은총의 최상 경지에 이를지라도 결코 신적 자아로 흡수(인간 피조물 = 하느님 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 모습의 원형(原型)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 또 이분을 통하여 우리가 창조되었음 (골로 1,16 참조)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원형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교적 신비를 드러낸다. 영원으로부터 성자께서는 성부와 관련하여 ‘다른’ 하느님이시면서, 성령 안에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시는’ 하느님이시다. 그 결과 이 ‘타자성’ (구별)은 결핍이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위대한 선이다. 결국 다른 성사들 안에서-그리고 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들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또한 우리를 그 자신의 신적 본성 안에 참여시켜 주신다. 그분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몸소 지니신 우리의 창조된 본성 곧 인간성을 말살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진리들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타종교의 기도가 나타내는 모든 영감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실재 안에서 완성될 뿐 아니라 개별적 자아나 피조물의 본성이 절대자의 무한한 영역 안으로 흡수되어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놀랍게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1요한 4,8). 이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단언은 영원한 교류와 영원한 대화로써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 곧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타자성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서 이렇듯 영원한 교류이시며 또한 우리는 성자와 더불어 성령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입양된 아들’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누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인간의 신화를 언급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완전히 옳은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됨으로써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또 ‘성자 안에서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며, 참으로 하느님의 삼위일체 생명을 나누는 자가 된다. 후기 비그리스도교적 고전 시대에는 완덕의 생활에 세 가지 단계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사이에 편의상 구분이 있었다. 이 같은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여러 학파들을 위한 모델로 인용되어 왔다. 이런 분류는 그 자체로 유효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오해를 피하는 올바른 그리스도교적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너 가지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 추구에 선행하고 수반되어야 할 것은 금욕적인 투쟁과 각자 자신의 죄와 오류로부터의 정화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 (마태 5,8)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와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정화되는 것이며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순수하게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이기적인 본능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이다. 육정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기심으로 기울기가 쉽다. 그 적극적 자유의 상태가 고전적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무감동’, 중세기에는 ‘무감각’,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서는 ‘초연’이라 불리었다. 이는 (죄로 기우는 육정의) ‘극복’ (극기)이라는 단어를 명백히 사용하는 것과 같이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자기 부정만이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성령의 자유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하느님께 기울이면서 모든 감각적 표현과 개념을 ‘비울 것’을 권장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요로써 충족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비움은 개인적 이기심을 포기하는 자기 극복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물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집중시켜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만큼 우리를 이기심에 얽어매는 이 세상의 사물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여러분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더 심오하고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영혼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찾고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 대한 추구를 묵상해 왔고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완전한 특성’ (로마 1,20)을 깨달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머문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교회의 위대한 박사는 우리 자신 안에 주의력을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아니고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의 자아를 초월하기를 권장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가장 깊은 존재보다 훨씬 더 심오하시며 나의 가장 높은 존재보다 훨씬 더 높으시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당신의 신비 안에서 우리를 초월해 계신다. 교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당신 성자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양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 성자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는 순수한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만 그분의 인간적 형상을 보는 것과 외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기”(요한 6,63) 때문이다. 그 말씀은 오히려 신앙의 은총으로써 가능한 안목을 뜻한다. 그것은 감각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그분께서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바를 보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안목’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그 형상으로부터 순전히 인간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인간적 형상 안에서 신적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간적 형식을 취한 예수님의 영원한 신적 차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가 ''''영신 수련''''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시작해 온 유한한 계시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실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를 붙잡아 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며 또한 당신의 영원한 사랑의 삼위일체 생명 안으로 우리를 온전히 끌어들이실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우시다. 그러나 이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은 결코 하느님의 계시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은 신앙의 진리들을 절대로 흐리지 않는다. 그 이후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실 조명의 은총들은 교회에 의해 고백되고 경축되는 신비들의 깊이를 더욱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당신의 찬란한 빛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 속에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주 대할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1요한 3,2 참조)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면 일치의 특별한 체험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성사들 특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객관적 출발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과 특유한 형태로 일치할 수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용어로써 신비로운 일치라 부른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그분의 길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고독 속으로 잠겨 드는 특정한 시기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그는 피조물로서 그리고 은총 안에서만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그의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교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기술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런 은총들이 그들의 개인적 기도 체험을 특징지어주며 또한 하느님께서는 청원자에게 개별적으로 은총을 베푸신다.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성령의 선물들과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거저 베푸시는 은사들을 구별해야 한다. 성령의 선물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망·애덕의 생활을 위한 열정으로써 자신을 북돋울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중한 금욕적 노력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체험 그리고 신앙의 내용들에 대한 특별한 체험에 도달할 수 있다. 은사에 관해서 사도 바오로는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1고린 12,17 참조). 이를 염두에 두고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곧 은사들은 예외적인 ‘신비로운’ 선물들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로마 12,3-21 참조) 또 ‘성령의 선물들’과 ‘은사들’의 구분은 유동적일 수 있다. 분명히 교회를 위한 결실을 가져다 주는 은사의 신약성서의 문맥 안에서 볼 때 특정 수준의 개인적 완덕 없이도 시행될 수 있으며, 반면에 ‘활동적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직자들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한’ (에페 4,15-16 참조) 특별한 과제를 (그리고 이런 뜻으로 ‘은사’를) 지닌다. 성직자들은 ‘사실상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모든 것을 분간하여 좋은 것을 보존해야 할’(교회 헌장, 12항) 책임이 있다. 동양의 그리스도교적 명상법은 가끔 서양의 기도 방식들 안에 결여되어 있는 정신 생리학적인 상징주의의 가치를 인정해 왔다. 그 영역은 특별한 신체적 자세에서부터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과 같은 기본적 생명 기능에 이르기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의 숭배로 전락시킬 수도 있으며 모든 신체적 느낌을 영적 체험으로 간주하게 되는 방향으로 은연 중에 이끌 수도 있다. 어떤 신체적 행위들은 평온과 긴장 완화의 느낌, 유쾌한 감정, 아마도 영적 안녕과 흡사한 빛과 따스함의 현상들을 자동적으로 받게 된다. 그러한 느낌들을 성령의 참다운 위안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성 생활을 전적으로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도덕적 상태가 신비적 체험에 부응하지 않을 때, 신비적 체험의 특유한 상징적 의미를 그 느낌들에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 분열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증세는 또한 심리적 불안정, 때로는 도덕적 탈선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기도에 대해 교회가 제시하는 다양하고 풍성한 측면들로부터 각 신자들은 자신의 방식을, 고유한 기도 방식을 추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개인적 기도 방식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르치고 실천하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길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개인적 취향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인도하시는 성령에 이끌려 나아가도록 자신을 내맡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이다. 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에까지 이르렀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처지까지 겪으셨기(마르 13,34 참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식을 몸소 결정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내맡겨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관상의 대상인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과 동일한 수준 위에 우리 자신을 올려 놓으려는 유혹을 모두 끊어 버려야 한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 믿음 안에 파견되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사랑의 감각적 숙고를 은혜로운 선물로 받고 또 주님의 진·선·미에 이끌리고 있음을 느낄 때에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 피조물이 하느님과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수록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그가 지니는 경외심은 더욱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당신께서는 저를 친구라 부르시지만 저는 자신을 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는 우리에게 한층 잘 알려진 말씀으로서 하느님과 가장 높은 경지의 친밀함을 누리신 마리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루가 1,48).
< 출처 : 주교회의 문헌자료 신앙교리성 문헌, '그리스도교 명상' > 2008-07-09 오전 11:39:23 .................................................................................................................................. 은총은 영혼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오류는 한결같이 죄인인 인간에게 유혹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무한한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인 양 그 간격을 시험하고 극복하도록 자극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상에서 취하신 방법을 이제는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하게 하며 순수한 은총으로 여겨져 왔던 것을 ‘초월적 인식’ 으로 간주하면서 자연 심리학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도록 유도한다. 이런 그릇된 유형들은 역사 안에서 줄기차게 등장해 왔으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종종 매혹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일종의 해결 방도로 즉, 하느님을 신속하게 발견하는 방도로 그리스도인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신비를 희랍 교부들은 인간의 신화 (神化)라고 불렀는데 그 신비에 가까이 나아가고 또 이를 실현하는 방법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우선 인간이 근본적으로 피조물이며 영원히 피조물로 존속하므로 인간의 자아가 은총의 최상 경지에 이를지라도 결코 신적 자아로 흡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 모습의 원형(原型)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 또 이분을 통하여 우리가 창조되었음 (골로 1,16 참조)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원형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교적 신비를 드러낸다. 영원으로부터 성자께서는 성부와 관련하여 ‘다른’ 하느님이시면서, 성령 안에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시는’ 하느님이시다. 그 결과 이 ‘타자성’ (구별)은 결핍이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위대한 선이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은 신앙의 진리들을 절대로 흐리지 않는다. 교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당신 성자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양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 성자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는 순수한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 (결합, 일치)하게 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타자성(구별, 차이)를 거부하는 바탕에서 '하느님의 자기 양도' (하느님 자신을 사람에게 "내어 주심")를 무시하고 ‘우리(인간) 자신 안에 인간 신, 곧 내면의 자기 신'이 있다는 뉴에이지적인 정신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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