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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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순 | 작성일2008-12-18 | 조회수40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의 묵상입니다. (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리스도교인과 비 그리스도교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다툼은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성령 잉태' 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여러 표징들은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들을 치유한 것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동정 잉태' 만큼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령 잉태'로 육화되어 예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게 될 오늘 복음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형성하는 주요 근거이므로 오늘 복음인 '성령 잉태'를 수용하느냐 여부로 우리 신앙의 기준을 삼는다고 판단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성령 잉태’ 만큼은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부활은 '육신의 부활'로 문자 그대로 설명하기 보다는 개과선천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잉태’만큼은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옛 위대한 인물은 거의가 탄생신화가 있고 나라 건국에는 건국신화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였다는 설화가 있으며 신라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가 있으며 김알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궤 속에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또 위대한 인물은 하늘에서 점지해 준다는 믿음도 있습니다. 이를 설화 또는 신화로 믿느냐 아니면 진실로 믿느냐로 다툼을 한다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저도 비 신자시절에는 교인들과 논쟁을 할 때에는 바로 오늘 복음인 ‘성령 잉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제 주장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면 너는 악령으로 잉태하였느냐고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태어나고 있는 고귀한 생명들에게 성령이 아닌 악령으로 잉태하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자연)의 섭리로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뒤늦게 영세를 받았으므로 이미 고착화된 이런 평소의 생각을 바꾸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영세 후에 변한 것이 있다면 이를 부인하는 입장에서 제 자신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신학을 가르치시는 모 교수님은 얼마 전 어느 세미나에서 신앙생활을 산타 할아버지에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실제로 선물을 주는 줄 알고 성탄 선물을 기대하며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한다 하였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며 자기 부모가 선물을 준 산타 할아버지 임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부모가 산타 할아버지를 얘기하면 자기를 속인다고 반발을 하게 되고, 이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님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도 이런 변화과정을 밟아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밑거름이 되는 성경의 묵상도 이런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도 산타 할아버지가 실재하신 것으로 믿었던 유아상태에서 계속하여 머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사실로 믿던 또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던 그것은 각자가 판단할 일입니다. 이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산타 할아버지가 있느니 없느니 하며 어린 아이들이 다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산타 할아버지로 다툰 아이들이 집에 가서 부모에게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물어보면 부모들은 ‘너도 옳고 그 아이도 옳다’ 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부모가 참된 부모이며 그런 종교지도자가 참된 지도자입니다. 자기 아이편만 들어 주는 부모는 참된 부모의 도리가 아니듯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정죄하는 종교지도자는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지극히 양심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양심을 속이며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 겠습니다. 우리가 존경해야 할 신앙인은 양심적인 신앙인이며 교리적 믿음이 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양심적인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수시입학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뒤늦게 시작한 것은 수시입학에 낙방하였으므로 더 노력하여 정시입학에 기대를 걸고 있으며 이도 아니면 추가 합격자 발표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의 성령 잉태'는 당시 함께 살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할 길이 없으므로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인정되어 유대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한 경우입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잉태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타지방으로 멀리 피신해야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또 출산도 타지방에서 출산을 해야 합니다. 유다지방의 산골로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유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출산한 이유가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혼전에 임신한 경우에는 가족들에게 처형당하는 '명예살인'이 종종 일어나므로 세계 인권단체들로 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당시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가 아니라 '고난의 마리아님 용기를 잃지 마소서'가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이런 고난을 극복하고 가혹한 유대율법에서 자신을 지키고 태중의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신 마리아님은 악법을 극복한 '승리의 여신' 입니다. 이런 내막을 자세하게 알았던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율법이 존재하는 것이며, 율법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인간 해방의 선구자가 되셨고 이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인간 예수님의 모습으로도 우리 인류의 영원한 귀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용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에서 동정녀는 저희 가톨릭 성경(이사 7.14)에는 '젊은 여자'로 되어 있고 개신교 성경에는 '처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애를 낳지 못한 여자'로 번역해야 올바른 번역이라 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마리아께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성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알았습니다. 저희도 편안만을 추구하는 삶을 청산하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갖은 고난을 극복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또한 이런 삶을 사시는 분들을 존경하며 지지를 보내는 그런 자들이 되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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