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루카 1장 5-25절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나이가 많았다.”
<견뎌내기 힘들 때 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의 이미지는 꽤나 경직된 분위기입니다. 징벌의 하느님, 심판관으로서의 하느님, 그래서 다가서기 힘든 엄한 아버지의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인들에게는 복주시지만 악인들은 엄중하게 벌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늘 풀지 못하는 숙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죄한 이들의 고통, 의인들이 겪는 시련이었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의인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조금의 흠도 없이 살아가던 완벽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참된 ‘의인’인 두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형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머리 위해 얹어진 면류관’이란 말이 있습니다. 연세가 들어가실수록 느끼실 것입니다. 잘 장성한 자식들, 제 갈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자식들은 부모의 가장 큰 보람이며 기쁨입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자식 없이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어언 60이 넘어 70이 다되어 갑니다. 친구들은 수많은 손자손녀들을 품에 안고 ‘이제 다 이루었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며 감격해했습니다. 큰 소리로 많은 후손을 번성케 하신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반면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어떻습니까? 손자손녀는커녕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상황 앞에 서있다면 하느님 원망 엄청 했을 것입니다. 대놓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건 내리지 않건 상관없이 자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제직에 충실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성전에 나아가 봉사했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이란 손가락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늦었지만 아주 큰 축복을 내리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축복의 몇 백배, 몇 천배나 되는 축복을 내리시는데, 바로 구약 시대 마지막을 장식할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잉태입니다.
칠흑같이 어둔 밤을 견뎌내고 계시는 분들,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신 분들, 하느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오시는 분들 부디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의 일생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철저하게도 낙관적인 신앙입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 우리의 불행을 못 본 척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에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96번 / 하느님 약속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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