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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어머니의 생명력인 낮아짐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0 조회수900 추천수9 반대(0) 신고

 

 

 

대림 제 4 주일 - 어머니의 생명력인 낮아짐

 

 

 

1885년 어느 날 밤 다미안 신부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에 지쳐 피곤해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욕을 하면 좀 피곤이 풀리려나싶어 목욕물을 끓였습니다. 잠깐 실수로 뜨거운 물이 발등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뜨거움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발이 데였는데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었습니다.

그는 소리 지르며 기뻐합니다. 그는 그 곳에 파견한 주교님께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드디어 하느님의 은총이 제게 내렸습니다.”

왜 다미안 신부가 나병에 걸리고 그렇게 기뻐했던 것일까요?

당시 하와이 군도의 몰로카이 섬은 온통 암벽으로 되어있고 물살이 세어서 나병환자들을 격리해 놓는 생지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1873년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였습니다.

“당신과 같은 성한 사람에게나 평화와 자유가 있지, 우리 같은 문둥이들한테 무슨 평화와 자유가 있겠소.”

그래도 그는 그 곳에 뼈를 묻을 결심으로 집을 지어주고 고름을 손수 짜 주며 그들의 떨어져나간 지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저에게도 저들과 같은 나병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는 생지옥을 평화의 섬으로 바꾸었고 나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그들 곁에서 죽었으며 그의 죽음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온 세계에 전염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죽음으로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연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은 반드시 썩고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사가 예리고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습니다.

스승께서도 보시다시피 저희 성읍은 매우 아름다우나 물이 나빠서 이 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샘터에 가서 그 소금을 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교회는 어머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녀를 출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출산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모님의 이 ‘예! (Fiat!: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는 ‘세상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할 내 아들의 고통을 함께 받겠느냐?’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그러겠다는 수락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기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받아야 할 고통을 몰래 감추어놓고 그것을 허락하겠느냐고 물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모님은 아무것도 죄에 의해 가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고통과 메시아와 한 몸이 되어 받아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너무도 명확하게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메온에게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관통할 것입니다.”라는 예언을 듣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예!’는 바로 자신을 죽이는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당신 태중에 생명을 잉태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는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물에다 소금을 뿌립니다. 그 소금이 물에 녹으니 그 물은 다시 생명을 주는 물로 바뀌어 자녀들을 출산하게 합니다. 물론 그 우물, 혹은 그 물이 스며든 땅은 교회, 혹은 성모님을 상징합니다.

성모님은 처녀이시기 때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명을 잉태하게 된 걸까요?

소금은 예수님의 ‘Fiat!’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세상에 녹이심으로써 교회가 더 이상 돌계집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물에 녹이심으로써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이 되었고 우리는 성모님 안에서 그 생명의 물을 통해 새로 태어나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받아들이는 ‘Fiat!’이 없었다면 이 일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혼인할 때 한 사람만의 ‘예!’로는 혼인이 성사되지 않듯이 예수님과 성모님 두 분의 ‘Fiat!’이 결합되면서 교회에서 수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출산되게 된 것입니다. 이 두 분의 ‘Fiat!’은 새 아담과 하와의 혼인서약입니다.

 

‘순종’은 ‘겸손’입니다. 다담과 하와가 ‘교만’하여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한 순종’으로 첫 아담과 하와의 ‘교만과 불순종’을 기워 갚으신 것입니다.

영어의 ‘겸손(humble)’은 본래 라틴어 ‘Humus’, 즉 ‘땅’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겸손하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된다는 말에 ‘하늘’이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결국 반대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땅’도 동시에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본래 하늘에서 왔지만 땅처럼 낮아졌기 때문에 두 분의 육체까지도 모두 하늘로 승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낮아짐엔 생명이 깃들어있고 높아짐엔 죽음이 서려있습니다. 땅은 어머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으로부터 생명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겸손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자신을 낮추는 모습 안엔 생명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가 그 정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 혹은 낮아짐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비움이 무엇을 주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낮아짐으로 베드로를 씻어주셔야 그 죄가 말끔히 씻기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다만 겸손의 모습만을 보여주시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겸손 안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힘이 들어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를 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성모님은 당신의 낮아짐과 겸손으로 당신 안에 생명을 잉태하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당신의 것만으로 삼지 않고 세상에 봉헌하십니다. 세상은 성모님을 통해 세상에 온 생명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자신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살리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대림 마지막 주를 맞는 지금 우리 안에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성모님의 겸손만한 묵상거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겸손이 추상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겸손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는 더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립 2,3)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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