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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44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1 조회수753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 대림 제4주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서문을 먼저 읽어보고 그 다음에는 목차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서문에는 책을 쓴 이유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고 목차를 통해 전개과정을 이해하고 있으면 무작정 책을 읽는 것보다는 저자의 의도와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요한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서문이 없을 뿐더러 목차도 없으므로 각 복음서를 하나의 큰 틀 속에서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1장이므로 서문으로 생각하고 루카 기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전체 메시지를 오늘 복음 속에 축약시켰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어제 미사(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은 동일함)가 끝나고 나서 오늘 복음의 의미를 다시 묵상하였습니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 9)하신 말씀처럼 오늘 복음에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큰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하였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하였듯이 우리도 이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한 것이 바로 묵상일 것입니다. 마리아가 곰곰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이를 저희도 곰곰이 생각하라는 루카 기자의 친절한 배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속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주님의 은총을 받는데 있습니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한 말은 바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하였습니다. 저도 주님의 은총만 받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은총을 가득 받았습니다. 왜 마리아는 주님의 은총을 가득 받았을까요? 그 답을 가브리엘 천사는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고 다시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받는 길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면 은총은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과 제가 함께하는 방법만 알면 은총은 저절로 받는 것이므로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과 함께 하는 방법은 제가 주님을 닮으면 함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은총은 제가 주님과 닮아갈 때 저절로 제게 오는 것이므로 은총은 저의 부단한 노력으로 제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사실 저는 주님을 본 적도 없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아들을 저희들에게 보내주셔서 당신의 아들처럼만 하면 당신을 닮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없고 하느님의 말을 직접 들을 수도 없으므로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으므로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처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비나이다.'도  '믿나이다.'도 아니며 오직 '따르렵니다.' 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주님과 함께 하신 분은 오직 마리아 한 분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유일하게 은총을 가득 받은 분입니다. '부자자전'이란 말처럼 그 어미에 그 아들이 태어나는 것이므로 성모님의 아들이어서 성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선인선과 독수독과 (마태 7,17)로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왜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지를 또 묵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기뻐하여라.' 한 천사의 말처럼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한 삶이기에 우리는 신나고 멋있게 살아서 아주 기쁘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소풍 나왔으므로 즐겁고 신나고 기쁘게 소풍을 즐겨야 합니다. 이런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바로 생로병사의 '苦' 때문입니다. 이 '苦'를 멸하는 가르침이 불가의 가르침이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주님으로 은총으로 이 '苦'를 멸하여 우리 삶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언어적 차이로 불가에는 '苦'라 하였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罪'라 하고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苦'를 멸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고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가 구원받아 기쁘게 신나게 사는 유일한 길임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苦' 와 '罪' 그런 것은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 평생 기쁘게 살기 위해서 사랑만 실천하면 됩니다. 주님이 시키는데로 무조건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오늘 묵상은 여기서 마무리 기도로 마감하고 나머지는 뱀 다리를 그려 보려고 합니다.

대자대비 하신 아빠 하느님!
우리 주 성자를 닮아가며 언제나 아빠 하느님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사족 하나)
우리 복음서에는 마리아를 찬양하는 대목은 오늘 복음과 이어진 대목이 거의 전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에는 마리아를 찬양하는 대목이 33구절인가 나온다는 글을 읽어 본 기억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들이 가장 소망하는 여성상은 바로 '성모 마리아님'이라 합니다.

(사족 둘)
예수님의 잉태와 관련된 마태오 복음서(1,19)에서 인용한 예언자의 말씀은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8일 대림 제3주일 목요일 묵상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으나 이사야서에는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 7,14) 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마태오 복음서에는 '동정녀'로 되어 있고 이사야서에는 왜 '젊은 여인'로 되어 있을까. 또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왜 이를 통일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저희 가톨릭 성경의 번역대본은 구약은 그리스어인 칠십인역 성경과 히브리어인 마소라 성경(유대인 성경)을 참고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은 BC 6세기에 바빌론 유수시기를 끝내고 귀환하여 곧바로 성전 건립과 함께 구전으로 전해오는 율법(토라)과 예언자의 예언(네비임)을 문자로 기록하였고 이 기록인 마소라 텍스트는 불행하게도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면서 모두 소실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경전을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을 위하여 BC 2 세기에 유대 12지파에서 6명씩 참가하여 72명이 당시 공용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이 칠십인역 성경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구약은 칠십인역 성경을 원전으로 하여 전래되었습니다.

마태복음서의 기자는 칠십인역 성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동정녀(처녀)로 기록하였으나 추후 복원한 마소라 텍스트 수사본의 이사야서에는 '젊은 여인'으로 되어 있어 저희 가톨릭 성경은 마소라 텍스트에 따르고 있고 마태오 복음서는 칠십인역 성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였으므로 이런 차이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 민족들은 끈기는 하여튼 존경스럽습니다. 자기들 성경이 소실되었으면 그리스어인 칠십인역 성경을 자국어인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마소라 텍스트를 복원하면 용이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히브리어 사본들을 하나하나 다시 수집하여 AD 2세기경에 1차 복원작업을 완료하였으나 10세기 말에 와서야 마소라 텍스트 수사본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습니다. 1947년 발견된 사해문서에 의해 마소라 텍스트의 수사본은 거의 정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합니다.

이사야서의 위 구절에서의 저희 성경처럼 '젊은 여인'이 되면 동정녀와는 차이가 있고 '젊은 여인'은 결혼한 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아이를 수태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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